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가을 편지 / 나호열

그림 / 노 숙 경 ​ ​ ​ 가을 편지 / 나호열 ​ 당신의 뜨락에 이름모를 풀꽃 찾아왔는지요 눈길 이슥한 먼 발치에서 촛불 떨어지듯 그렇게 당신을 바라보는 꽃 ​ 어느 날 당신이 뜨락에 내려오시면 이미 가을은 깊어 당신은 편지를 읽으시겠는지요 ​ 머무를 수 없는 바람이 보낸 당신을 맴도는 소리죽인 발자국과 까만 눈동자 같은 씨앗들이 눈물로 가만가만 환해지겠는지요 ​ 뭐라고 하던가요 작은 씨앗들은 그냥 당신의 가슴에 묻어 두세요 상처는 웃는다 라고 기억해 주세요 ​ 당신의 뜨락에 또 얼마마한 적막이 가득한지요 ​ ​ ​ 나호열 시인 *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 1986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 1991년 《시와시학》 중견시인상 수상 * 2004년 녹색 ..

바람의 시간들 / 이규리

그림 / 안 효 숙 ​ ​ ​ 바람의 시간들 / 이규리 종일 바람 부는 날, 밖을 보면 누군가 떠나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을 위해 허공은 가지를 빌려주었을까 그 바람, 밖에서 부는데 왜 늘 안이 흔들리는지 종일 바람을 보면 간간이 말 건너 말을 한다 밖으로 나와, 어서 나와 안이 더 위험한 곳이야 하염없이 때때로 덧없이 떠나보내는 일도 익숙한 그것이 바람만의 일일까 이별의 경험이 이별을 견디게 해주었으니 바람은 다시 바람으로 오리라 종일 바람 부는 날, 밖을 보면 나무가 나무를 밀고 바람이 바람을 다 밀고 ​ ​ ​ 이규리 시집 / 이럴 땐 쓸쓸해도 돼 ​ ​ ​

개혁 / 권 영 하 <신춘문예 당선 시>

​ 개혁 / 권 영 하 ​ ​ 도배를 하면서 생각해보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낡은 벽은 기존의 벽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진액을 빨아 버짐으로 자랐다 벽지를 그 위에 새로 바를 수도 없었다 낡고 얼룩진 벽일수록 수리가 필요했고 장판 밑에는 곰팡이꽃이 만발발했다 합지보다 실크 벽지를 제거하는 것이 더 힘들고 시간도 많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사하거나 집을 새로 지을 수도 없었기에 낡은 벽을 살살 뜯어내고 새 벽지를 재단해 잘 붙였야 했다 습기는 말리고 울퉁불퉁한 곳에 초배지를 발랐다 못자국과 흔적은 남아있었지만 잘 고른 벽지는 벽과 천장에서 환하게 뿌리를 내렸다 온몸에 풀을 발라 애면글면 올랐기에 때 묻고 해진 곳은 꽃밭이 되었다 갈무리로 구석에 무늬를 맞추었더니 날개 다친 나비도 날아올랐다 방안이 보송보송해졌다 ​..

블루 / 나 호 열

그림 / 박 상 희 ​ ​ ​ 블루 / 나 호 열 ​ ​ ​ 투명한데 속이 보이지 않는 풍덩 빠지면 쪽물 들 것 같은데 물들지 않는, ​ 가슴이 넓은 너에게로 가면 나는 새가 되고 유유히 헤엄치는 인어가 되지 푸를 것 같은데 푸르지 않는 눈물처럼 너는 나의 하늘 너는 나의 바다 ​ 그저 푸름이지 푸름이지 되뇌면 푸릉푸릉 싹이 돋을 것 같은 ​ ​ 시집 /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 천양희

그림 / 김 정 수 ​ ​ ​ ​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 천양희 ​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산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강 건너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집까지 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하면서 나는 그걸 위해 다른 것 다 버렸지요. 그땐 슬픔도 힘이 되었지요. 그 시간은 저 혼자 가버렸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지요. ​ ​ ​ 시집 /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 ​ ​ ​

정착 / 이 병 률

그림/ 김 윤 선 ​ ​ ​ 정착 / 이 병 률 ​ ​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집을 지을 것이다 아프리카 마사이 여부족처럼 결혼해서 살 집을 내손으로 지을 것이다 ​ 꽃을 꺾지 않으려는 마음도 마음이지만 꽃을 꺾는 마음도 마음이라고 말할 것이다 ​ 내가 여자라면 사랑한다고 자주 말할 것이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신을 매번 염려할 것이다 ​ 내가 여자라면 칼을 들고 산으로 빨려 들어가 춤을 출 것이다 ​ 그러다 작살을 쥐고 한 사내의 과거를 해집을 것이다 외롭다고 말한 뒤에 외로움의 전부와 결속할 것이다 ​ 내가 여자로 태어난다면 고아로 태어나 이불 밑에다 북어를 숨겨둘 것이다 숨겨 두고 가시에 찔리고 찔리며 살다 그가시에 체할 것이다 ​ 생애 동안 한 사람에게 나눠 받은 것들을 지울 것이며 생략할 것이다 ​..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 나 호 열

그림 / 진 선 미 ​ ​ ​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 나 호 열 ​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세상이 싫어 산에 든 사람에게 산이 가르친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힘쓰고 싶으면 힘을 써라 길을 내고 싶으면 길을 내고 무덤을 짓고 싶으면 무덤을 지어라 산에 들면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 않는다 제 풀에 겨워 넘어진 나무는 썩어도 악취를 풍기지 않는다 서로 먹고 먹히면서 섣부른 한숨이나 비명은 들리지 않는다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바람의 문법 물은 솟구치지 않고 내려가면서 세상을 배우지 않느냐 산의 경전을 다 읽으려면 눈이 먼다 천 만 근이 넘는 침묵은 새털 보다 가볍다 산이 사람을 가르친다 죽어서 내게로 오라 ​ ​ ​ 나호열 시집 / 당신에게 말 걸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