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길 위에서 중얼 거리다 / 기 형 도

그림 / 조 지 원 ​ ​ ​ 길 위에서 중얼 거리다 / 기 형 도 ​ ​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들이여 ​ ​ ​ 기형도 시집 / 입 속의..

봄 / 이 성 부

그림 / 김 정 연 ​ ​ ​ ​ 봄 / 이 성 부 ​ ​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 ​ ​ 시집 / 당신에게 시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 ​ *1942년 전남 광주 출생 *첫 시집 (이성부 시집) 1969,으로 현대문학상 수상 *전남일보 신춘문예..

원죄 / 최 영 미

그림 / 박 광 선 ​ ​ ​ 원죄 / 최 영 미 ​ ​ 모르는 사람과 악수하지 않고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고 너무 표시내고 목소리가 크고 알아서 잘해주지 않고 눈치도 상식도 없고 높은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하고 (알아야 눈치를 보지) 신간이 나와도 책을 돌리지 않고 선배 대접을 하지 않고 후배를 챙기지 않고 (후배가 가방인가? 챙기게...) ​ 파란불이 켜지면 제일 먼저 건너고 (살 떨리는 순발력!) 젊은 애들보다 걸음이 빠르고 맛있는 건 혼자 먹는 사람 ​ 인생은 맛있는 것만 골라 먹는 뷔페가 아니야 ​ ​ 최영미 시집 / 공항 철도 ​ ​ ​

마지막 기회 / 최 영 미

그림 / 박 광 선 ​ ​ ​ 마지막 기회 / 최 영 미 ​ ​ 늦게까지 독신이던 친구 A가 결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남자보다 테니스를 좋아하던 B도 선을 봐서 결혼 했다고 ​ 마지막 남은 노처녀들이 일망타진되던 봄 ​ 침대에 누워 푸른 바다에 몸을 맡겼다 산과 바다가 보이는 속초의 아파트에서 ​ 더 늦기 전에 아이라도 건질까? ​ 여자친구들이 떠난 뒤 남자들이 떠난 뒤 문장만이 오래 살아남아 ​ 이십 년이 지나도 마르지 않는 잉크 담배나 태워야지 ​ ​ ​ 최영미 시집 / 공항철도 ​ ​ ​

왜목바다 / 박 영 대

그림 / 이 경 선 ​ ​ ​ 왜목바다 / 박 영 대 ​ ​ 푸른끼라고는 없는 저 갯벌 하나 키우기 위해 파도는 얼마나 많은 기저귀를 빨아댔는지 ​ 간간하게 절여진 구름 사이로 나이 든 바다가 힘들어 하는 걸 보면 ​ 뜨고 지는 피곤에 몸져 누운 뼈마디 쑤셔 그렁그렁 붉게 앓고 있다 ​ 삼백예순날 때 맞춰 끼니상 차려주는 아침해를 오늘 하루만 알아주는 생일날 ​ 늙수레한 왜목바다 부축해 일으켜 세운다​ ​ ​ ​ *한국현대시인협회 총장 *아태문인협회 지도위원 *한국신문예문학회 자문위원 *서울미래예술협회 수석이사 ​ ​

칼과 집 / 나 호 열

그림 / Bea mea soon ​ ​ 칼과 집 / 나 호 열 ​ ​ 어머니는 가슴을 앓으셨다 말씀 대신 가슴에서 못을 뽑아 방랑을 꿈꾸는 나의 옷자락에 다칠세라 여리게 여리게 박아 주셨다 (멀리는 가지 말아라) 말뚝이 되어 늘 그 자리에서 오오래 서 있던 어머니, 나는 이제 바람이 되었다 함부로 촛불도 꺼뜨리고 쉽게 마음을 조각내는 아무도 손 내밀지 않는 칼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서 길 잃은 바람이 되었다 어머니, ​ ​ ​ 시집 / 칼과 집 ​ ​

생각하믄 뭐하겄냐 / 강 경 주

그림 / 정 은 하 생각하믄 뭐하겄냐 / 강 경 주 손 한번 안 잡아주고 혼자 훌쩍 떠나더니 요새 부쩍 네 아부지가 밤마다 왔다 간다 뒤밟아 따라가다가 까마득 놓치곤 한다야 오라는 건지 있으란 건지 희미한 그 손짓 막걸리도 안 마셨는데 눈앞이 어룽하다 생각함 다 뭐하겄냐 살아 돌아올 것도 아니고 강경주 시집 / 노모의 설법

고백적 형상 / 권 기 선

그림 / 정 은 숙 고백적 형상 / 권 기 선 달에서 터진 향기가 구름 뒤에서 부서진다 별 없는 하늘 사람들의 무릎이 울고 있다 숨길 수 없는 신체 앞에서 모든 자세의 무릎은 지나치게 가지런하다 보관된 감정의 무게를 짊어지지 못하거나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균형을 잃을 때 무릎은 끓어서 자신의 모두를 놓는다 작열하는 사막 한가운데 낙타는 발을 구른다 무슨 벌(罰)처럼 그의 혹이 무겁다 단단하고 묵직한 자세의 고요한 방을 자물쇠로 잠근다 장례의 온기가 파랗게 흔드린다 달은 자신의 한쪽을 찢어 터져나온 향기로, 끈임없이 하늘의 저편을 메운고 있다 1933년 충북 음성 출생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석사과정 재학중 2019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꽃과 별 / 나 태 주

그림 / 한 경 화 ​ ​ ​ 꽃과 별 / 나 태 주 ​ ​ 너에게 꽃 한 송이를 준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내 손에 그것이 있었을 뿐이다 ​ ​ 막다른 골목길을 가다가 맨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너였기 때문이다 ​ ​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본다 어둔 밤하늘에 별들이 빛나고 있었고 다만 내가 울고 있었을 뿐이다. ​ ​ ​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