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초원의 빛 / 윌리엄 워즈워스

그림 / 이 상 옥 ​ ​ ​ 초원의 빛 / 윌리엄 워즈워스 ​ ​ 한때 그토록 찬란했던 빛이건만 이제는 속절없이 사라진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남으리 존재의 영원함을 티 없는 가슴으로 믿으리 삶의 고통을 사색으로 어루만지고 죽음마저 꿰뚫는 명철한 믿음이라는 세월의 선물로 ​ ​ ​ 시집 / 매일 시 한 잔 ​ ​ ​

길 / 김 석 흥

그림 / 이 갑 인 ​ ​ ​ 길 / 김 석 흥 ​ ​ ​ 눈에 보이는 길은 길이 아니다 철새들이 허공을 날아 번식지를 찾아가듯 연어떼가 바닷속을 헤엄쳐 모천으로 돌아오듯 별들이 밤하늘을 스스로 밝혀가듯 시공을 가르며 만들어 가는 보이지 않는 그 길이 바로 길이다 ​ ​ 끝이 있는 길은 길이 아니다 나를 찾아 떠나는 끝 모르는 여정 꽃길을 걸은 적이 있었지 가시밭길을 지나온 때도 있었고 숲속에서 길을 잃어 헤매기도 하였지 그러면서 쉼 없이 한 발 두 발 걸어온 길 돌아 보니 지나온 그 길들이 이어져 시나브로 내 삶이 되었다 ​ ​ ​ 김석흥 시집 / 천지연 폭포 ​ ​ ​

밥 먹는 법 / 정 호 승

​ 그림 / 조 수 정 ​ ​ ​ 밥 먹는 법 / 정 호 승 ​ ​ 밥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 것 ​ 무엇 보다도 전시된 밥은 먹지 말 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 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 것 굶어서 가벼워질 것 ​ 때때로 바람 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밥상은 물질로 충족된 삶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물질에 무릎을 꿇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 정호승 시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 ​ ​

큰산 / 나 호 열

그림 / 김 형 숙 큰산 / 나 호 열 어느 사람은 저 산을 넘어가려 하고 어느 사람은 저 산을 품으려 하네 어느 사람은 높아서 큰 산이라 하고 어느 사람은 품이 넓어 큰 산이라고 하네 발힘이 흔들거려 쉬어가야겠다 넘지도 안기지도 못한 사람들은 저 홀로 산이 되었네 넘지도 안을 수도 없는 산 내게도 있네 시집 /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노을 / 홍해리

세인트조셉 / 미시간 ​ ​ 노을 / 홍해리 보내고 난 비인 자리 그냥 수직으로 떨어지는 심장 한 편 투명한 유리잔 거기 그대로 비치는 첫이슬 빨갛게 익은 능금나무 밭 잔잔한 저녁 강물 하늘에는 누가 술을 빚는지 가득히 고이는 담백한 액체 아아, 보내고 나서 혼자서 드는 한 잔의 술 ​ ​ ​ 홍해리 시인 / 약력 ​ * 충북 청주에서 출생(1942년)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1964년) 1969년 시집 를 내어 등단함. ​ ​ ​ 시집

그녀가 보고 싶다 / 홍 해 리

​ 그녀가 보고 싶다 / 홍 해 리 크고 동그란 쌍거풀의 눈 살짝 가선이 지는 눈가 초롱초롱 빛나는 까만 눈빛 반듯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도톰하니 붉은 입술과 잘 익은 볼 단단하고 새하얀 치아 칠흑의 긴 머릿결과 두 귀 작은 턱과 가는 허리 탄력 있는 원추형 유방 연한 적색의 유두 긴 목선과 날씬한 다리 언뜻 드러나는 이쁜 배꼽 밝은 빛 감도는 튼실한 엉덩이 고슬고슬하고 도톰한 둔덕 아래 늘 촉촉 젖어 잇는 우윳빛 샘 주렁주렁 보석 장신구 없으면 어때, 홍분 백분 바르지 않은 민낯으로 나풀나풀 가벼운 걸음걸이 깊은 속내 보이지 않는 또깡또깡 단단한 뼈대 건강한 오장육부와 맑은 피부 한번 보면 또 한 번 보고 싶은 하박하박하든 차란차란하든 품안에 포옥 안기는, ​ ​ 시집 / 봄, 벼락치다 ​ ​ ​

비애에 대하여 / 나 호 열

그림 / 유 영 국 ​ ​ 비애에 대하여 / 나 호 열 늙은 베틀이 구석진 골방에 앉아 있다 앞뜰에는 봄꽃이 분분한데 뒤란엔 가을빛 그림자만 야위어간다 몸에 얹혀졌던 수많은 실들 뻐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 나는 수동태의 긴 문장이다 간이역에 서서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급행열차의 꼬리를 뒤따라가던 눈빛이 마침표로 찍힌다 삐거덕거리머 삭제되는 문장의 어디쯤에서 황토길 읍내로 가던 검정고무신 끌리는 소리가 저무는 귀뚜라미 울음을 닮았다 살아온 날 만큼의 적막의 깊이를 날숨으로 뱉어낼 때마다 베틀은 자신이 섬겼던 주인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엄불레라 창간호 (2021) ​ ​ ​ ​ ​

놀란 강 / 공 광 규

그림 / 정 경 희 ​ ​ ​ 놀란 강 / 공 광 규 ​ ​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했는데 모래밭은 몸을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도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 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지린 강 ​ ​ ​ ​ ​

나이 / 김 재 진

그림 / 시 경 자 ​ ​ ​ 나이 / 김 재 진 ​ 나이가 든다는 것은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보고 싶은 사람보다 볼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는 슬픔을 순서대로 만나는 것이다 세월은 말을 타고 가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침내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되는 것이다 ​ ​ ​ ​ ​

땅에게 바침 / 나 호 열

그림 / 이 경 자​ ​ ​ ​ 땅에게 바침 / 나 호 열 ​ ​ 당신은 나의 바닥이었습니다 내가 아카루스의 꿈을 꾸고 있던 평생 동안 당신은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온몸을 굳게 누이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고개를 숙이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이 보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질 때에도 당신은 안개꽃처럼 웃음 지었던 것을 없던 날개를 버리고 나니 딩신이 보입니다 바닥의 힘으로 당신은 나를 살게 하였던 것을 쓰러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