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6월의 언덕 / 노천명​

그림 / 신 정 혜 ​ ​ ​ 6월의 언덕 / 노천명​ ​ 아카시아꽃 핀 6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든다 ​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해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가지고 안으로 들다 ​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안하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피는 6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 ​ ​ ​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 조 병 화

그림 / 데스 브로피 ( Des Brophy ) ​ ​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 조 병 화 ​ ​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과거가 있단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과거가... ​ 비가오는 거리를 혼자 걸으면서 무언가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란다. ​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거리에 한 줄의 시를 띄우지 못하는 사람은 애인이 없는 사람이란다. ​ 함박눈 내리는 밤에 혼자 앉아 있으면서도 꼭 닫힌 창문으로 눈이 가지 않는 사람은 사랑의 덫을 모르는 가엾는 사람이란다. ​ ​ 시집 /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 ​ ​

오월을 떠나보내며   / 목 필 균

오월을 떠나보내며 / 목 필 균 다시 돌아오지 못할 또 하나의 오월을 떠나 보내며 향기로웠다 노래하지 못하겠다. 다시 만나지 못할 또 한 번의 오월을 흘려보내며 따뜻했다 말하지 못하겠다. 울타리 장미 짙은 입술로도 손짓하지 못한 그리움 아카시아 흐드러진 향기로도 답하지 못한 사랑 뒤돌아 밟아보지 못한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무심한 구름으로 흘러 5월의 마지막 햇살이 지는 서쪽 하늘을 배웅한다.

못 / 김 석 흥

그림 / 설 윤 혜 ​ ​ ​ 못 / 김 석 흥 ​ ​ 말을 잘 들어야 한다 ​ 못마땅하다고 고개 쳐들면 머리를 몇 대 더 맞는다 몸 꼿꼿이 세우고 버티다가는 허리가 구부러지고 불도가니에 들어가 녹아버릴지도 모른다 ​ 두둘겨 맞아도 참자, 한순간만 탈 없이 오래 사는 길이니까 ​ 그런데, 너무 고분고분하면 나를 쇠가 아닌 물로 볼까 봐 걱정이다 ​ ​ 시집 / 천지연 폭포 ​ ​ 그림 / 설 윤 혜

가죽 그릇을 닦으며 / 공 광 규

그림 / 권 옥 연 ​ ​ ​ 가죽 그릇을 닦으며 / 공 광 규 ​ ​ 여행준비 없이 바닷가 민박에 들러 하룻밤 자고 난 아침 ​ 비누와 수건을 찾다가 없어서 퐁퐁으로 샤워하고 행주로 물기를 닦았다 ​ 몸에 행주질을 하면서 내 몸이 그릇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뼈와 피로 꽉 차 있는 가죽 그릇 수십 년 가계에 양식을 퍼 나르던 그릇 ​ 한때는 사람 하나를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1960년산 중고품 가죽 그릇이다 ​ 흉터 많은 가죽에 묻은 손때와 쭈글쭈글한 주름을 구석구석 잘 닦아 ​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오래오래 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 ​ ​ 문예감성 / 2021 봄 , 24호 ​ ​ 그림 / 박 삼 덕 ​

이재무 / 국 수

​ 이재무 / 국 수 ​ ​ 늦은 점심으로 밀국수를 삶는다 ​ 펄펄 끓는 물속에서 소면은 일직선의 각진 표정을 풀고 척척 늘어져 낭창낭창 살가운 것이 신혼적 아내의 살결 같구나 ​ 한결 부드럽고 연해진 몸에 동그랗게 몸 포개고 있는 결연의 저, 하얀 순결들! ​ 엉키지 않도록 휘휘 젓는다 면발 담긴 멸치 국물에 갖은양념을 넣고 코밑 거뭇해진 아들과 겸상을 한다 ​ 친정간 아내 지금쯤 화가 어지간히는 풀렸으리라 ​ ​ ​ ​ 국수와 친구 / 이 효 ​ ​ 혼자 먹는 국수보다 둘이 먹는 국수가 더 맛있다 친구는 국수가 목으로 술술 넘어가듯 언제 보아도 물리지 않는다 ​ 살다가 지치고 힘들 때면 성북동 뒷골목 국숫집을 간다 그곳에는 늘 어깨 쳐진 사람들 친구를 찾아오듯 허름한 국숫집을 찾아온다 ​ 따뜻한 국수..

둥지새 / 정 끝 별

그림 : 박 항 률 ​ ​ 둥지새 / 정 끝 별 ​ 발 없는 새를 본 적 있니?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에 쉰다지 낳자마자 날아서 딱 한번 떨어지는데 바로 죽을 때라지 먹이를 찾아 뻘밭을 쑤셔대본 적 없는 주둥이 없는 새도 있다더군 죽기 직전 배고픔을 보았다지 ​ 하지만 몰라, 그게 아니었을지도 길을 잃을까 두려워 날기만 했을지도 뻘밭을 헤치기 너무 힘들어 굶기만 했을지도 ​ 낳자마자 뻘밭을 쑤셔대는 둥지새 날개가 있다는 걸 죽을 때야 안다지 세상의, 발과 주둥이만 있는 새들 날개 썩는 곳이 아마 多情의 둥지일지도 못 본 것 많은데 나, 죽기 전 뭐가 보일까 ​ ​ ​ 정끝별 시인 약력 *1964년 전남 나주 출생 *1988년 신인상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등. *평론집 *현재..

이혼 고백장 / 나 혜 석

​ 조선의 유식 계급 남자 사회는 불쌍합니다. ​ ​ 애매한 요릿집에나 출입하며 죄 없는 술에 투정을 다하고, 몰상식한 기생을 품고 즐기나 그도 역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 ​ 유식 계급 여자, 즉 신 여성도 불쌍하외다. ​ ​ 아직도 봉건시대 가족제도 밑에서 자라나고 시집가고 살림하는 ​ ​ 그들의 내용의 복잡이란 말할 수 없이 난국이외다. ​ ​ 조선 남성 심리는 이상하외다. ​ ​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 ​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 ​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 ​ , 1934.9 ​ ​ 나혜석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숲, 나무에서 배우다 / 김 석 흥

그림 : 신 은 봉 ​ ​ ​ 숲, 나무에서 배우다 / 김 석 흥 ​ ​ ​ 숲에 사는 나무는 박애주의자다 생김새가 다르다고 다투기는 하나 미워하지 않는다 키가 좀 작다고 허리가 굽었다고 업신여기지 않는다 언제나 주어진 자리에 서 있을 뿐 결코 남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는다 숲에 들어서면 가슴이 환해지는 이유이다 ​ 숲을 지키는 나무들은 거룩한 성자다 산새들이 몸통 구석구석을 쪼아 대고 도려내도 아픈 기색 보이지 않는다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잠을 설쳐도 끝내 쓴소리 한 번 내지 않고 폭설에 여린 팔 하나쯤 부러져도 오르지 끝 끝모르는 사랑으로 품어 안는다 숲에 들어서면 영혼이 맑아지는 이유다 ​ ​ ​ 시집 / 천지연 폭포 (김석흥 시인) ​ ​ 그림 : 김 연 희 ​ ​ ​ ​ ​ ​ ​ ​

아름다움이 힘이니라 / 이어령

작품 : 인 미 애 ​ ​ 아름다움이 힘이니라 / 이어령 ​ ​ 3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무덤이 발굴되던 날 사람들은 놀랐다. 거기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았었구나. ​ 어느 짐승 어느 원숭이가 눈물방울 같은 꽃송이를 뿌리며 무덤을 만드는 것을 본 적 있는가. 오직 인간만이 먹을 수도 입을 수도 없는 꽃을 꺾어서 죽은자의 제단을 만든다. ​ ​ 벌과 나비는 꿀을 따기 위해 꽃을 찾지만 사람은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꽃밭으로 간다. 사람을 만든 한 송이의 꽃 영혼을 만든 한 송이의 향기 짐승의 이빨이나 발톱보다도 강한 한 송이의 꽃잎 ​ ​ 수원 화성을 지을 때 신하들이 상소하기를 "무릇 성곽이란 예부터 적을 막기 위한 것. 튼튼하고 강하면 그만인 것을 어찌하여 아름답게 꾸미시려다 성심마저 상하시려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