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염천교 다리 아래 비는 내리고 / 정 호 승

그림 : 정 낙 희 ​ ​ ​ 염천교 다리 아래 비는 내리고 / 정 호 승 ​ ​ 염천교 다리 아래 비는 내리고 내 힘으로 배우고 성공하자는 구인광고 벽보판에 겨울비는 내리고 서울역을 서성대던 소년 하나 빗속을 뚫고 홀로 어디로 간다 ​ 서울역에 서서히 어둠은 내리는데 서울역전 우체국 앞에도 비는 내리는데 아저씨, 어디로 가시는지 신문 한 장 사보세요, 네? 신문팔이 소녀의 목소리는 겨울비에 젖는다 ​ 서울역 시계탑 아래서 만나던 순아 돌아갈 곳 없이 깊어가는 서울밤 사람들의 가슴마다 불이 켜지고 무작정 상경한 소녀는 비에 젖어 어느 남자 손에 이끌려 소리없이 사라지는데 ​ 염천교 다리 아래 비는 내리고 염천교 다리 아래 빈 기차는 지나가고 흔들리는 빈 기차의 흐린 불빛 하나 젖은 내 가슴을 흔들고 지나..

벗 하나 있었으면 / 도 종 환

그림 : 김 선 정 ​ ​ ​ 벗 하나 있었으면 / 도 종 환 ​ ​ ​ 마음이 울적할 때 저녁 강물 같은 벗 하나 있었으면 날이 저무는데 마음 산그리메처럼 어두워올 때 내 그림자를 안고 조용히 흐르는 강물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 ​ ​ 울리지 않는 악기처럼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낮은 소리로 내게 오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 노래가 되어 들에 가득 번지는 벗 하나 있었으면 ​ ​ ​ 오늘도 어제처럼 고개를 다 못 넘고 지쳐 있는데 달빛으로 다가와 등을 쓰다듬어 주는 벗 하나 있었으면 그와 함께라면 칠흑 속에서도 다시 먼 길 갈 수 있는 벗 하나 있었으면 ​ ​ ​ 당신은 누구십니까 / 창작과 비평사 ​

새 1 / 이 남 우

​심정수 작품 (1) ​ 새 1 / 이 남 우 ​ ​ 들 논 트랙터 지나간 자리에 가지런히 꽂힌 나락 하늘 파란 구름은 눈에 잡히는 아버지 그리고 가슴에 스며오는 바람 이야기 차라리 구분하지 않았으면 내게 서러움이 없을 논두럭 새는 벌레 잡기에 지 생명 걸지만 보는 나 그 날갯짓에 목숨을 걸....... ​ ​ ​ 이남우 시집 : 나무 ​ ​ ​ ​ ​ ​ 심정수 작품 (6)

길 위에서 / 나 희 덕

그림 : 정 진 경 ​ ​ 길 위에서 / 나 희 덕 ​ ​ 길을 잃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의 길을 잃게 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떤 개미를 기억해내었다. 눅눅한 벽지 위 개미의 길을 무심코 손가락으로 문질러버린 일이 있다. ​ ​ 돌아오던 개미는 지워진 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전혀 엉뚱한 길로 접어들었다. 제 길 위에 놓아주려 했지만 그럴수록 개미는 발버둥치며 달아나버렸다. ​ ​ 길을 잃고 나서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도 누군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냄새 같은 게 있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인연들의 길과 냄새를 흐려놓았던지, 나의 발길은 아직도 길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 ​ ​ 나희덕 시집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 ​ ​ ​ ​ ​ ​ 인천 강화군 교동도

놀란 강 / 공 광 규

그림 : 김 경 희 ​ ​ 놀란 강 / 공 광 규 ​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 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 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

장미의 날 (5월 14일)

​ 5월은 참 분주하고, 세상이 화려한 빛깔로 잔치를 벌인다. ​ 5월 8일 어린이날 5월 14일 장미의 날 5월 15일 스승의 날 5월 21일 부부의 날 ​ 노란 장미는 변하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 ​ ​ 이 노란 장미를 / 릴케 ​ ​ 이 노란 장미를 어제 그 소년이 내게 주었다. 오늘 그 장미를 들고 소년의 무덤으로 간다. ​ 꽃잎에는 아직 물방울이 맺혀 있다. 오늘 눈물인 이것 어제 이슬이었던 것... ​ ​ ​ 빨강 장미는 불타는 정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나는 누군가를 정열적으로 사랑해 보았는가? ​ ​ 분홍색 장미는 행복을 맹세한다. 결혼을 하면서 행복을 맹세했다. 나는 정말 행복한가? ​ ​ 이 장미는 돌연변이 장미인가 사랑이 옮겨 다닌다. 붉은색, 흰색, 노란색 사랑이 너무 가볍다. ​..

이별 노래 / 정 호 승

그림 : 김 미 숙 ​ ​ ​ 이별 노래 / 정 호 승 ​ ​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그대의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 ​ ​ 문예감성 24호 / 2021 봄 ​ ​ ​ ​

비행기재 / 나 호 열

그림 : 이 선희 ​ ​ ​ 비행기재 / 나 호 열 ​ 옷고름 절로 풀리는 여름 한낮 무성한 풀섶을 헤치며 또아리틀듯 길이 칭칭 산을 동여맨다 읊조릴 것 같은데 산은 오르막 몸이 풀리고 핏줄은 짙푸른 힘으로 길을 절정의 저 너머로 밀어낸다 푸드득, 산을 뒤틀며 뛰쳐오르는 새들 더덕냄새 풍긴다 도라지꽃이 활짝 핀다 천궁 씨알이 알알이 배이고 나그네는 내리막길을 휘이 뒷모습만 돌아서 가고 ​ * 비행기재 강원도 정선 땅의 높은 고개 ​ ​

수종사 풍경 / 공 광 규

그림 : 조 성 호 ​ ​ ​ 수종사 풍경 / 공 광 규 ​ ​ 양수강이 봄물을 산으로 퍼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과 비에 얇어진 몸 ​ 바람이 와서 마른 몸을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소리 ​ ​ 문예감상 / 2021 봄호 ​ ​ 그림 : 전 지 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