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해바라기의 오해 / 마 경 덕

그림 : 박 영 숙 ​ ​ 해바라기의 오해 / 마 경 덕 ​ ​ 가을이 해체되었다 이 죽음은 합법적이다 내장이 드러난 콩밭과 목이 잘린 수수밭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 곁에 끝없이 펼쳐진 해바라기밭 ​ 꽃이어서, 해바라기는 다행이었다 ​ ​ 그림 : 박 영 숙 ​ ​ 이 작은 오해가 해바라기를 무럭무럭 키웠다 폭염을 삼킨 머리는 칼을 쓴 듯 무거워도, 함께 사진을 찍으며 사람보다 더 해맑게 웃었다 사방을 물들인 노랑노랑노랑 ​ 노랑은 유쾌하고 명랑한 색 ​ ​ 그림 : 박 영 숙 ​ ​ 까맣게 영근 늦가을 볕이 누런 해바라기 밭을 들락거리고 기름을 줄줄 흘리는 해바라기들 ​ ​ 그림 : 박 영 숙 ​ ​ 고개 너머 주인이 목을 칠 날짜를 받아놓고 숫돌에 낯을 가는 동안에도 발목에 차꼬를 매달고 익어가는 죄..

까닭 / 나 태 주

그림 : 영 희 ​ ​ 까닭 / 나 태 주 ​ ​ 꽃을 보면 아, 예쁜 꽃도 있구나! 발길 멈추어 바라본다 때로는 넋을 놓기도 한다 ​ 고운 새소리 들리면 어, 어디서 나는 소린가? 귀를 세우며 서 있는다 때로는 황홀하기까지 하다 ​ 하물며 네가 내 앞에 있음에야! ​ 너는 그 어떤 세상의 꽃보다도 예쁜 꽃이다 너의 음성은 그 어떤 세상의 새소리보다도 고운 음악이다 ​ 너를 세상에 있게 한 신에게 감사하는 까닭이다. ​ ​ ​

날마다 생일이다 / 강 경 주

그림 : 최 미 ​ ​ 날마다 생일이다 / 강 경 주 ​ ​ 이 나이 되어 봐라 날마다 생일이다 ​ 주어진 하루하루가 새롭다, 선물 같다 ​ 숨 쉬는 순간 순간이 이슬 같다, ​ 신기하다 ​ ​ ​ 본디 설렘이었던 것 / 강 경 주 ​ 씨앗으로 맺히기 전의 저 꽃은 무엇이고 ​ 꽃으로 오기 전의 설렘은 무엇인지 ​ 그 설렘 가마득한 길을 아지랑이처럼 가는 것 ​ ​ 그냥 웃는 것이듯이 / 강 경 주 ​ 웃을까 말까 생각하다가 웃는 거 아니듯이 ​ 꽃이라고 필까 말까 생각하다가 피겠느냐 ​ 애비야, 질까 말까 생각했다면 꽃이 문득 지겠느냐 ​ ​ 손 한번 잡지 않고도 / 강 경 주 ​ 간밤에 네 애비 와서 내게 손을 내밀더라 ​ 손 한번 잡는데 평생 걸리다니, ​ 손 한번 잡지 않고도 평생을 살았다니.....

무너진 사람탑 / 천 양 희

작품 : 이 명 일 무너진 사람탑 / 천 양 희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잠언은 망언이 된 지 오래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은 다르고 변화와 변질이 다르다는 말 믿지 않은 지 오래다 과정보다는 결과를 도전보다는 도약을 꿈꾼 지 오래다 허명도 명성이라 생각하고 치욕도 욕이라 생각 않은 지 오래다 젊은이는 열정이 없고 늙은이는 변화가 없는 지 오래다 예술과 상술이 혼돈하고 시업과 사업을 구별하지 못 한 지 오래다 고난이 기회를 주지 않고 위기가 기회가 되지 않은 지 오래다 그러니 꿈도 꾸지 마라 자존심 하나로 버틸 생각 죄 안 짓고 살 생각 그러니 너는 조금씩 잎을 오므리듯 입을 다물라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 천 양 희

그림 : 조 태 영 ​ ​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 천 양 희 ​ ​ 남편이 실직으로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엄마, 고뇌하는 거야? 다섯 살짜리 딸 아이가 느닷없이 묻는다 고뇌라는 말에 놀란 그녀가 고뇌가 뭔데? 되물었더니 마음이 깨지는 거야, 한다 꽃잎 같은 아이의 입술 끝에서 재앙 같은 말이 나온 이 세상을 그녀는 믿을 수가 없다 책장을 넘기듯 시간을 넘기고 생각한다 깨어진 마음을 들고 어디로 가나 고뇌하는 그녀에게 아무도 아무 말 해주지 않았다 하루 종일 길모퉁이에 앉아 삶을 꿈꾸었다 ​ ​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 ​ 그림 : 권 영 애

봄의 시인 / 이어령

​ 봄의 시인 / 이어령 ​ ​ 꽃은 평화가 아니다. 저항이다. 빛깔을 갖는다는 것, 눈 덮인 땅에서 빛깔을 갖는다는 것 그건 평화가 아니라 투쟁이다. ​ ​ 검은 연기 속에서도 향기를 내뿜는 것은 생명의 시위. 부지런한 뿌리의 노동 속에서 쟁취한 땀의 보수. ​ ​ 벌과 나비를 위해서가 아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가 아니다. 꽃은 오직 자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색채와 향기를 준비한다. 오직 그럴 때만 정말 꽃은 꽃답게 핀다. ​ ​ 꽃은 열매처럼 먹거나 결코 씨앗처럼 뿌려 수확을 얻지는 못한다. 다만 바라보기 위해서 냄새를 맡기 위해서 우리 앞에 존재한다. ​ ​ 그래서 봄이 아니라도 마음이나 머리의 빈자리 위에 문득 꽃은 핀다. ​ ​ 시인의 은유로 존재하는 꽃은 미소하고 있는 게 아니다 가끔 분노로 타..

나비에게 / 이 해 인

​ 나비에게 / 이 해 인 ​ 너의 집은 어디니? ​ ​ 오늘은 어디에 앉고 싶니? ​ ​ 살아가는게 너는 즐겁니? 죽는 게 두렵진 않니? ​ ​ 사랑과 이별 인생과 자유 그리고 사람들에 대하여 ​ ​ 나는 늘 물어볼 게 많은데 ​ ​ 언제 한번 대답해주겠니? ​ ​ 너무 바삐 달려가지만 말고 지금은 잠시 나하고 놀자 ​ ​ 갈곳이 멀더라도 잠시 쉬어가렴 사랑하는 나비야 ​ ​ ​ 나비에게 / 이 해 인 ​ 너의 집은 어디니? ​ 오늘은 어디에 앉고 싶니? ​ 살아가는게 너는 즐겁니? 죽는 게 두렵진 않니? ​ 사랑과 이별 인생과 자유 그리고 사람들에 대하여 ​ 나는 늘 물어볼 게 많은데 ​ 언제 한번 대답해주겠니? ​ 너무 바삐 달려가지만 말고 지금은 잠시 나하고 놀자 ​ 갈곳이 멀더라도 잠시 쉬어가렴..

행복과 항복 / 나 호 열

그림 : 나 순 단 행복과 항복 / 나 호 열 가끔 나는 행복을 항복으로 쓴다 아차! 싶어 머리를 긁적이다가 요즘은 아예 행복을 항복으로 쓴다 항복은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외친다는 것 공손히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는 것 밥 한 그릇에 김치 몇 조각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아침 햇살에 번쩍 눈을 뜰 때도 그러했으니 나는 행복하게 항복하고 항복하니 행복하다 그림 : 나 순 단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 석 헌

그림 : 정 경 혜 ​ ​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 석 헌 ​ 만 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방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굽이 돌아가는 길 / 박노해

굽이 돌아가는 길 / 박 노 해 올곧게 뻗은 나무들보다는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습니다 똑바로 흘러가는 물줄기보다는 휘청 굽이친 강줄기가 더 정답습니다 일직선으로 뚫린 빠른 길보다는 산 따라 물 따라 가는 길이 더 아름답습니다 곧은 길 끊어져 길이 없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돌아서지 마십시오 삶은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시집 : 마음이 예뻐지는 시 (정지영의 내가 사랑하는 시) 우리가 가는 길이 항상 꽃길만은 아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