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바닷가에 대하여 / 정 호 승

그림 / 이 효 경 ​ ​ ​ 바닷가에 대하여 / 정 호 승 ​ ​ ​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누구나 바닷가 하나씩은 언제나 찾아갈 수 있는 자기만의 바닷가가 있는 게 좋다 잠자는 지구의 고요한 숨소리를 듣고 싶을 때 지구 위를 걸어가는 새들의 작은 발소리를 듣고 싶을 때 새들과 함께 수평선 위로 걸어가고 싶을 때 친구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지 못했을 때 서럽게 우는 어머니를 껴안고 함께 울었을 때 모내기가 끝난 무논의 저수지 둑 위에서 자살한 어머니의 고무신 한 짝을 발견했을 때 바다에 뜬 보름달을 향해 촛불을 켜놓고 하염없이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싶을 때 바닷가 기슭으로만 기슭으로만 끝없이 달려가고 싶을 때 누구나 자기만의 바닷가가 하나씩 있으면 좋다 자기만의 바닷가..

풋고추에 막걸리 한잔하며 / 홍 해 리

풋고추에 막걸리 한잔하며 / 홍 해 리 처음 열린 꽃다지 풋고추 몇 개 날된장에 꾹꾹 찍어 막걸리를 마시네 나도 한때는 연하고 달달했지 어쩌다 독 오른 고추처럼 살았는지 죽을 줄 모르고 내달렸는지 삶이란 살다 보면 살아지는 대로 사라지는 것인가 솔개도 하늘을 날며 작은 그늘을 남기는데 막걸리 한잔할 사람이 없네 아파도 아프다 않고 참아내던 독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가 보잘것없는 꽃이 피고 아무도 모르는 새 열매를 맺어 접시에 자리잡은 고추를 보며 검붉게 읽어 빨갛게 성숙한 가을을 그리네 홍해리 시인 / 약력 ​ * 충북 청주에서 출생(1942년)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1964년) 1969년 시집 를 내어 등단함. ​ ​ ​ 시집

바다와 나비 / 김 기 림​

그림 / 김 미 영 ​ ​ ​ 바다와 나비 / 김 기 림 ​ ​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알려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公主)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 ​ 김기림 시선집 / 바다와 나비 (작가와 비평) ​ ​ ​

세상에 나와 나는 / 나 태 주

그림 / 소 순 희 ​ ​ ​ 세상에 나와 나는 / 나 태 주 ​ ​ 세상에 나와 나는 아무것도 내 몫으로 차지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 꼭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푸른 하늘빛 한 쪽 바람 한 줌 노을 한 자락 ​ 더 욕심을 부린다면 굴러가는 나뭇잎새 하나 ​ 세상에 나와 나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으로 간직해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 꼭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단 한 사람 눈이 맑은 그 사람 가슴속에 맑은 슬픔을 간직한 사람 ​ 더 욕심을 부린다면 늙어서 나중에도 부끄럽지 않게 만나고 싶은 한 사람 그대. ​ ​ ​ 나태주 시집 / 혼자서도 별인 너에게 ​ ​ ​

너를 만나러 가는 길 / 용 혜 원

그림 / 허 필 석 ​ ​ ​ 너를 만나러 가는 길 / 용 혜 원 ​ ​ ​ 나의 삶에서 너를 만남이 행복하다 ​ 내 가슴에 새겨진 너의 흔적들은 이 세상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 나의 길은 언제나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 그리움으로 수놓은 길 이 길은 내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도 내가 사랑해야 할 길이다 ​ 이 지상에서 내가 만난 가장 행복한 길 늘 가고 싶은 길은 너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 ​ ​ ​ 시집 / 용혜원의 그대에게 주고 싶은 나의 시 ​ ​ ​

간발 / 황인숙

그림/ 이 재 구 ​ ​ ​ 간발 / 황인숙 ​ ​ 앞자리에 흘린 지갑을 싣고 막 떠나간 택시 오늘따라 지갑이 두둑도 했지 ​ 애가 타네, 애가 타 당첨 번호에서 하나씩 많거나 적은 내 로또의 숫자들 ​ 간발의 차이 중요하여라 시가 되는지 안 되는지도 간발의 차이 간발의 차이로 말이 많아지고, 할 말이 없어지고 ​ 떠올랐던 시상이 간발 차이로 날아가고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놓치고 길을 놓치고 날짜를 놓치고 사람을 놓치고 ​ 간발의 차이로 슬픔을 놓치고 슬픔을 표할 타이밍에 웃음이 터지기도 했네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뺨을 푸들거리며 ​ 놓친 건 죄다 간발의 차이인 것 같지 누군가 써버린 지 오랜 탐스런 비유도 간발로 놓친 것 같지 ​ 간발의 차이에 놓치기만 했을까 잡기도 했겠지, 생기기도 했겠지 간발의 차..

석류 / 복 효 근

그림 / 김 정 수 ​ ​ ​ 석류 / 복 효 근 ​ ​ 누가 던져놓은 수류탄만 같구나 불발이긴 하여도 서녘 하늘까지 붉게 탄다 네 뜰에 던져놓았던 석류만한 내 심장도 그랬었거니 불발의 내 사랑이 서천까지 태우는 것을 너만 모르고 나만 모르고.... 어금니 사려물고 안으로만 폭발하던 수백 톤의 사랑 혹은 적의 일지도 모를 ​ ​ ​ ​ 복 효 근 * 1962년 전라북도 남원 출생 * 1988년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 1991년 계간 『시와시학』으로 등단 *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버마재비 사랑』 『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마늘촛불』 『따뜻한 외면』 『꽃 아닌 것 없다』 ​ ​ ​ ​ ​

겨울달 / 문 태 준

그림 / 전 지 숙 ​ ​ ​ 겨울달 / 문 태 준 ​ ​ 꽝꽝 얼어붙은 세계가 하나의 돌멩이 속으로 들어가는 저녁 ​ 아버지가 무 구덩이에 팔뚝을 집어넣고 밑동이 둥굴고 크고 흰 무 하나를 들고 나오시네 ​ 찬 하늘에는 한동이의 빛이 떠 있네 ​ 시래기 같은 어머니가 집에 이고 온 저 빛 ​ 문태준 시집 /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 ​ ​ ​

추암에서 / 나 호 열

​ ​ ​ ​ 추암에서 / 나 호 열 ​ ​ ​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공손해진다. 어떤 거만함도, 위세도 멀리서 달려와 발 밑에 부서지는 포말에 불과한 것임을 모르는 채 깨닫게 된다. 바다 앞에 서면 우리 모두는 공손해진다. 보지 않으려해도 볼 수 밖에 없는 수평선을 보며 위태로운 줄타기의 광대가 되는 자신을 떠올리거나 수평선의 끝을 잡고 줄넘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무의식적으로 손을 길게 내밀어 고무줄처럼 수평선을 끌어당기고 싶다면 아직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좀 더 살아야하는 것이다. ​ ​ ​ 그림 / 김 경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