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9월도 저녁이면 / 강 연 호

그림 / 정 경 혜 ​ ​ ​ ​ 9월도 저녁이면 / 강 연 호 ​ ​ ​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 ​ ​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 ​ ​ ​ ​ ​

날품 / 김 명 희

그림 / 정 은 하 ​ ​ 날품 / 김 명 희 ​ 이른 새벽 한 무리의 인부들이 봉고차에 실린다 이내 어느 현장으로 옮겨진 그들 어둠을 깨고 부수고 그 위에 아침을 쌓는다 건물이 한 뼘씩 오를 때마다 그들의 몸은 개미들처럼 작아진다 안전화는 전혀 안전하지 못한 공중만 떠들고 가벼운 지폐 몇 장 삼겹살과 소주로 선술집 상을 채우는 고마운 저녁 밤이 이슥해지자 한둘만 남기고 봉고차는 어둠저쪽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심히 흘려 넣은 거나한 꿈들은 졸음 한켠 후미진 담벼락에서 음습한 절망으로 젖어간다 희망의 괘도를 벗어난 안전화만이 누군가의 넋두리를 따라서 귀가하는 밤 이젠, 욱신거리는 잠의 날품을 팔아야 할 시간이다 ​ ​ ​ ​ 김명희 시집 / 화석이 된 날들 ​ ​ ​ ​

말표 고무신 260 / 나 호 열

그림 / 최 윤 아​ ​ ​ 말표 고무신 260 / 나 호 열 ​ 일주일에 한 번 산길 거슬러 오는 만물트럭 아저씨가 너를 데려다주었어 말표 흰 고무신 260 산 첩첩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이곳에서 몇날며칠을 달려도 닿지 못하는 지평선을 향해 내 꿈은 말이 되어보는 것 이었어 나도 말이 없지만 너도 말이 없지 거추장스러운 장식도 없이 그저 흙에 머리를 조아릴 때 내 못난 발을 감싸주는 물컹하게 질긴 너는 나의 신이야 ​ * 월간 중앙 / 2021년 9월호 ​ ​ ​

푸른 밤 / 나 희 덕

그림 / 드미트리 홀린 (러시아) ​ ​ ​ 푸른 밤 / 나 희 덕 ​ ​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 김용택 시집 /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 ​ ​ ​

한 잎의 여자 / 오 규 원

그림 / 권 신 아 ​ ​ ​ 한 잎의 여자 / 오 규 원 ​ ​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

연못을 웃긴 일 / 손택수

그림 / 아고르 베르디쉐프 (러시아) ​ ​ 연못을 웃긴 일 / 손택수 ​ ​ 못물에 꽃을 뿌려 보조개를 파다 ​ 연못이 웃고 내가 웃다 ​ 연못가 바위들도 실실 물주름에 웃다 ​ 많은 일이 있었으나 기억에는 없고 ​ 못가의 벚나무 옆에 앉아 있었던 일 ​ 꽃가지 흔들어 연못 겨드랑이에 간질밥을 먹인 일 ​ 물고기들이 입을 벌리고 올라온 일 ​ 다사다난했던 일과 중엔 그중 이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 ​ ​ * 손택수 시집 /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 ​

제 눈을 꺼 보십시오 / 릴케

그림 / 이르고 베르디쉐프 (러시아) ​ ​ ​ 제 눈을 꺼 보십시오 / 릴케 ​ 제 눈을 꺼 보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제 귀를 막아 보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리가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으며 입이 없어도 당신에게 청원할 수 있습니다. 저의 팔을 꺾어보십시오. 손으로 하듯 저는 저의 심장으로 당신을 붙잡습니다. 저의 심장을 멎게 해보십시오. 저의 뇌가 맥박칠 것입니다. 당신이 저의 뇌에 불을 지피면 저는 저의 피에 당신을 싣고 갈 것입니다. ​ ​ *1901 순례자 / ​ ​ ​

나팔꽃 / 이해인

그림 / 김 정 수 ​ 나팔꽃 / 이 해 인 ​ ​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의 생애는 당신을 행해 열린 아침입니다 ​ 신선한 뜨락에 피워 올린 한 송이 소망 끝에 내 안에서 종을 치는 하나의 큰 이름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 순명(順命)보다 원망을 드린 부끄러운 세월 앞에 해를 안고 익은 사랑 ​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날 나는 한 송이 나팔꽃입니다 *1945년 강원도 양구 출생 *1964년 수녀원 *필리핀 성 루이스대학 영문학과,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 * 제9회 제2회 제6회 을 수상 * 첫 시집 * 시집

길 위에서의 생각 / 류 시 화

그림 / 송 춘 희 ​ ​ 길 위에서의 생각 / 류 시 화 ​​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 ​ ​ 류시화 시집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 ​

저 거리의 암자 / 신 달 자

그림 / 용 환 천 ​ ​ ​ ​ 저 거리의 암자 / 신 달 자 ​ ​ ​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 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 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 낙지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 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