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단풍 드는 날 / 도 종 환

그림 / 민 경 윤 ​ ​ ​ ​ 단풍 드는 날 / 도 종 환 ​ ​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 제 삶이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방하착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 ​ *방하착(放下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아라" 마음을 비우다라는 뜻의 불교 용어 ​ ​ ​ 도종환 시집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 ​

​천 년의 문 / 이 어 령

작품 / 송 은 주 ​ ​ ​ ​ 천 년의 문 / 이 어 령 ​ ​ ​ 절망한 사람에게는 늘 닫혀있고 희망 있는 사람에게는 늘 열려 있습니다. 미움 앞에는 늘 빗장이 걸려 있고 사랑 앞에는 늘 돌쩌귀가 있습니다. ​ 천년의 문이 있습니다. 지금 이 문이 이렇게 활짝 열려 있는 까닭은 희망과 사랑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 새 천 년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것입니다. 새 천 년은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입니다. ​ 빗장 없는 천 년의 문이 이렇게 활짝 열려 있는 것은 미움의 세월이 뒷담으로 가고 아침 햇살이 초인종 소리처럼 문 앞에 와 있는 까닭입니다. ​ ​ ​ ​ 이어령 시집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 ​

그 꽃의 기도 / 강은교

그림 / 조 청 수 ​ ​ ​ ​ 그 꽃의 기도 / 강은교 ​ 오늘 아침 마악 피어났어요 내가 일어선 땅은 아주 조그만 땅 당신이 버리시고 버리신 땅 나에게 지평선을 주세요 나에게 산들바람을 주세요 나에게 눈 감은 별을 주세요 그믐 속 같은 지평선을 그믐 속 같은 산들바람을 그믐 속 같은 별을 내가 피어 있을 만큼만 내가 일어서 있을 만큼만 내가 눈 열어 부실 만큼만 내가 꿈꿀 만큼만 ​ ​ ​ ​

호박(琥珀)속의 모기 / 권 영 하(2012 농민 신문 시조 당선작)

출처 / NAVER ​ ​ ​ 호박(琥珀)속의 모기 / 권 영 하 (2012 농민 신문 시조 당선작) ​ ​ ​ 호박(琥珀) 속에 날아든 지질시대 모기 한놈 목숨은 굳어졌고 비명도 갇혀 있다 박제된 시간에 갇혀 강울음은 딱딱하다 멈추는 게 비행보다 힘드는 모양이다 접지 못한 양날개, 부릅뜬 절규의 눈 온몸에 깁스한 관절 마디마디 욱신댄다 은밀히 펌프질로 흡협할 때 달콤했다 빨알간 식욕과 힘, 그대로 몸에 박고 담황색 심연 속에서 몇 만년을 날았을까 전시관에 불을 끄면 허기가 생각나서 호박 속의 모기는 이륙할지 모르겠다 살문향(殺蚊香) 피어오는 도심을 공격하러 ​ ​ ​ ​ *1965년 경북 영주 출생 *문경시 점촌 중학교 교사 ​ ​ ​

​좋은 뼈대 / 매기 스미스

그림 / 장순 영 ​ ​ ​ ​ 좋은 뼈대 / 매기 스미스 ​ 인생은 짧다, 비록 내 아이들에겐 이것을 비밀로 하겠지만, 인생은 짧다, 그리고 흘러간 내 삶은 더 짧아졌다 수없이 달콤하고, 어리석은 짓들로 인해, 달콤하고도 어리석은 수많은 행동들 내 아이들에겐 비밀로 할 것이다. 세상은 적어도 오십 퍼센트는 끔찍한 곳, 그조차도 긍정적으로 바라본 평가인 것을, 비록 내 아이들에겐 이것을 비밀로 하겠지만, 많은 새들 중에는 던진 돌에 맞는 새도 한 마리 있을 것이고, 많은 사랑 받는 아이들 중에는 부서지고, 자루에 담겨, 호수에 버려지는 아이도 있는 법, 인생은 짧다, 그리고 세상은 적어도 절반은 끔찍하다, 그리고 많은 낯선 사람들 중에는, 당신을 부수고 넘어뜨리려는 이도 하나쯤 있을 것이다. 내 아이들에..

아침에 전해준 새 소리 / 나 호 열

그림 / 박 진 우 ​ ​ ​ ​ 아침에 전해준 새 소리 / 나 호 열 ​ ​ 죽지 않을 만큼만 잠을 잔다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죽지 않을 만큼만 꿈을 꾼다 죽지 않을 만큼만 말을 하고 죽지 않을 만큼만 걸어간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 누군가 외로울 때 웃는 것조차 죄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야 될 것 같아서 아, 그러나, 그러나 모든 경계를 허물지 않고 죽지 않을 만큼만 사랑할 수는 없다 누구나 말하지 않는가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뛰어넘고 싶다 ​ ​ ​ ​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그림 / 한 예 진 ​ ​ ​ 상처에 대하여 / 복효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 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즘 보니 모든 상처의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 ​ ​ ​ ​

핑고 / 황정현(2021,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그림 / 알렉산드로 예고로프 핑고 / 황정현 (2021,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극지의 순록은 우아한 뿔을 가졌다 거친 발굽으로 수만 년을 걸어왔다 죽은 자식을 통도에 던지며 발길을 돌려야 했고 비틀걸음으로 얼음산을 넘어야 했고 살점을 떼어 어린 자식의 배를 불려야 했고 뿔을 세워 침입자에 맞서야 했고 온몸을 쏟아 무리를 지켰다 죽어서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치열한 싸움에서 늘 이기고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은 무덤을 등에지고 돌아왔다 무덤은 살고 당신은 죽었다 무덤 속에서 얼음이 자라고 있다 얼음은 흙을 밀어 올려 산이 될 것이다 얼음의 계절이 오면 순록은 바늘잎나무숲으로 순례를 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당신의 길이 보인다.

사람에게 묻는다 / 휴틴

그림 / 이 형 미 ​ ​ ​​ 사람에게 묻는다 / 휴틴 ​ ​ 땅에게 묻는다 땅은 땅과 어떻게 사는가? 땅이 대답한다 우리는 서로 존경하지 ​ 물에게 묻는다 물과 물은 어떻게 사는지? 물이 대답한다 우리는 서로 채워주지 ​ 사람에게 묻는다 사람과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스스로 한번 대답해 보라 ​ ​ ​ 휴틴(1942~) 베트남 작가, 미국과 전쟁당시 해방군 전사로 참전하여 중령까지 승진한 전쟁영웅이기도하다. 시집 (겨울 편지) 대표 시집 ​ ​ ​ 시집 / 매일 시 한잔 (두 번째) 저자 / 윤동주, 배정애 ​ ​ ​ ​ ​ ​

당신의 당신 / 문 혜 연 (201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림 / 김 현 경 ​ ​ 당신의 당신 / 문 혜 연 (2019,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새들의 울음은 그들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될까요 원래 인간은 제 이름보다 남의 이름을 더 많이 부르는 종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이름을 새들에게 우리는 우리일까요 우리를 대신할 말을 찾아요 수많은 단어들이 사라져요 뻐끔거리던 입술들이 짝을 짓습니다 입술을 부딪치며, 서로에게 옮아가는 인간들 새들은 인간과 상관없이 날아다닙니다 새들은 새들이고, 우리는 우리입니다 부리를 부딪치는 새들은 정다운 만큼 가벼운가 봐요 자신을 닮은 사람을 세 번 만나면 죽는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요 지렁이와, 지렁이 모양 젤리 그걸 공포라 할 수 있나요 머리와 꼬리를 알 수 없는 젤리는 달콤하고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