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비애에 대하여 / 나 호 열

그림 / 민 경 윤 ​ ​ ​ 비애에 대하여 / 나 호 열 ​ ​ ​ ​ ​ 늙은 베틀이 구석진 골방에 앉아 있다 앞뜰에는 봄꽃이 분분한데 뒤란엔 가을빛 그림자만 야위어간다 몸에 얹혀졌던 수많은 실들 뼈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 ​ 나는 수동태의 긴 문장이다 간이역에 서서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의 꼬리를 뒤따라가던 눈빛이 마침표로 찍힌다 삐거덕거리며 삭제되는 문장의 어디쯤에서 황톳길 읍내로 가던 검정고무신 끌리는 소리가 저무는 귀뚜라미 울음을 닮았다 ​ 살아온 날만큼의 적막의 깊이를 날숨으로 뱉어낼 때마다 베틀은 자신이 섬겼던 주인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 ​ ​ ​ 나호열시집 / 안부 ​ ​ ​ ​ ​ ​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 나 태 주

그림 / 이 은 주 ​ ​ ​ ​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 나 태 주 ​ ​ ​ ​ 서툴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어제 보고 오늘 보아도 서툴고 새로운 너의 얼굴 ​ 낯설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금방 듣고 또 들어도 낯설고 새로운 너의 목소리 ​ 어디서 이 사람을 보았던가... 이 목소리 들었던가... 서툰 것만이 사랑이다 낯선 것만이 사랑이다 ​ 오늘도 너는 내 앞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오늘도 나는 네 앞에서 다시 한 번 죽는다. ​ ​ ​ ​ ​ ​ 시집 / 나태주 대표시 선집 ​ ​ ​ ​

그래서 / 김 소 연

그림 / 최 종 대 ​ ​ ​ ​ ​ 그래서 / 김 소 연 ​ ​ ​ ​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 ​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 ​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 ​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 ​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 ​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 ​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

새해의 기도 / 이 성 선

그림 / 이 종 연 ​ ​ ​ ​ ​ 새해의 기도 / 이 성 선 ​ ​ ​ ​ ​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 ​ ​ ​ 문태준 시집 / 시가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것이다 ​ ​ ​ ​ ​ ​

그릇 / 오 세 영

그림 / 박 지 숙 그릇 / 오 세 영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절제와 균형의 중심에서 빗나간 힘, 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 이성의 차가운 눈을 뜨게 한다. 맹목의 사랑을 노리는 사금파리여, 지금 나는 맨발이다. 베어지기를 기다리는 살이다. 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시집 / 살아 있는 흙 .

그 사랑에 대해 쓴다 / 유 하

그림 / 김 정 수 ​ ​ ​ 그 사랑에 대해 쓴다 / 유 하 ​ ​ ​ 아름다운 시를 보면 그걸 닮은 삶 하나 낳고 싶었다 노을을 바라보며 노을빛 열매를 낳은 능금나무처럼 ​ 한 여자의 미소가 나를 스쳤을 때 난 그녀를 닮은 사랑을 낳고 싶었다 점화된 성냥불빛 같았던 시절들, 뒤돌아보면 그 사랑을 손으로 빚고 싶다는 욕망이 얼마나 많은 열정의 몸짓들을 낳았던 걸까 그녀를 기다리던 교정의 꽃들과 꽃의 떨림과 떨림의 기차와 그 기차의 희망, 내가 앉았던 벤치의 햇살과 그 햇살의 짧은 키스 밤이면 그리움으로 날아가던 내 혀 속의 푸른 새 그리고 죽음조차도 놀랍지 않았던 나날들 ​ 그 사랑을 빚고 싶은 욕망이 나를 떠나자, 내 눈 속에 살던 그 모든 풍경들도 사라졌다 바람이 노을의 시간을 거두어 가면 능금나무..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ᆞ1 / 용 혜 원

그림 / 강 풀 ​ ​ ​ ​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 ᆞ1 / 용 혜 원 ​ ​ ​ ​ 그대를 만나던 날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 ​ 착한 눈빛, 해맑은 웃음 한마디, 한마디의 말에도 따뜻한 배려가 있어 잠시 동안 함께 있었는데 오래 사귄 친구처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 내가 하는 말들을 웃는 얼굴로 잘 들어주고 어떤 격식이나 체면 차림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솔직하고 담백함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 그대가 내 마음을 읽어주는 것만 같아 둥지를 잃은 새가 새 둥지를 찾은 것만 같았습니다 짧은 만남이지만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오랜만에 마음을 함께 맞추고 싶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장미꽃 한 다발을 받은 것보다 더 행복했습니다 ​ 그대와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더 좋은 사람입니다 ​ ​ ​..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그림 / 김 정 수 ​ ​ ​ ​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 ​ ​ ​ ​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 ​ 시집 / 그리운 여우 ​ ​ ​ ​

별들은 따뜻하다 / 정 호 승

그림 / 권신아 ​ ​ ​ 별들은 따뜻하다 / 정 호 승 ​ ​ ​ 하늘에는 눈이 있다 두려워할 것은 없다 캄캄한 겨울 눈 내린 보리밭길을 걸어가다가 새벽이 지나지 않고 밤이 올 때 내 가난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 나에게 진리의 때는 이미 늦었으나 내가 용서라고 부르던 것들은 모두 거짓이었으나 북풍이 지나간 새벽 거리를 걸으며 새벽이 지나지 않고 또 밤이 올 때 내 죽음의 하늘 위로 떠오른 별들은 따뜻하다 ​ ​ ​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 ​ ​

그 손 / 김 광 규

그림 / 김 정 숙 ​ ​ ​ ​ ​​ 그 손 / 김 광 규 ​ ​ ​ ​ ​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 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뻗쳐도 닿을락 말락 끝내 놓쳐버린 손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그 손 ​ ​ ​ ​ ​ 시집 / 시가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것이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