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봄비 / 이경임

그림 / 김미옥 ​ ​ ​ 봄비 / 이경임 ​ ​ 빗방울들은 무겁다 어떤 빗방울들은 꽃잎처럼 부드럽지만 이 빗방울들은 메스처럼 날카롭다 ​ 이 빗방울들은 핏방울처럼 무겁지 않다 이 빗방울은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처럼 나른하다 ​ 비가 캄캄한 늑골 속에서 야옹야옹 내린다 비가 고양이의 하품처럼 빈터를 뒹군다 ​ 나는 늑골 속에서 무언가를 도려내야 할지도 모른다 너는 움직이지 않고 늑골 속에 죽은 듯이 붙어 있고 싶은 것이다 ​ 빈터에는 싱싱한 것들이 생각 없이 쑥쑥 돋아난다 ​ ​ ​ ​ 시집 /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 ​ ​ ​ ​

강물을 따라가며 울다 / 정호승

그림 / 구본준 ​ ​ ​ ​ 강물을 따라가며 울다 / 정호승 ​ ​ 내 몸 속에 석가탑 하나 세워놓고 내 꿈속에 다보탑 하나 세워놓고 어느 눈 내리는 날 그 석가탑 쓰러져 어느 노을지는 날 그 다보탑 와르르 무너져내려 눈 녹은 물에 내 간을 꺼내 씻다가 눈 녹은 물에 내 심장을 꺼내 씻다가 그만 강물에 흘려보내고 울다 몇날 며칠 강물을 따라가며 울다 ​ ​ ​ ​ ​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 ​ ​

벽돌 쌓기 / 이수명

그림 / 이고르 베르디쉐프 (러시아) ​ ​ ​ 벽돌 쌓기 / 이수명 ​ ​ ​ 비 오는 날이면 나는 벽돌을 쌓는다 한장 한장 눈먼 벽돌을 잠자는 벽돌을 끝없이 높이 쌓는다. 내가 잠들 때까지 내가 고함쳐 벽돌들을 와르르 깨워도 깨진 채 벽돌들이 다시 무거운 잠에 빠지고 나는 그 위에서 고요해질 때까지 벽돌처럼 붉은 침묵의 핏덩이가 될 때까지 그 핏덩이로 굳어버릴 때까지 나는 쌓는다. 비 오는 날이면 죽은 자의 이빨같이 움직이지 않는 벽돌들을 나란히 차곡차곡 가슴속에 쌓는다. 빗물이 스미지 않게 빗물이 나를 맛보지 않게 눈먼 벽돌들을 ​ ​ ​ ​ 이수명 시집 /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 ​ ​ ​

봄눈 / 정호승

그림 / 김 정 수 ​ ​ ​ ​ 봄눈 / 정호승 ​ ​ ​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 ​ ​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 ​

내가 숲에 간다는 것은 / 김율도

그림 / 사영희 ​ ​ ​ 내가 숲에 간다는 것은 / 김율도 ​ ​ 내가 숲에 간다는 것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야생동물을 다 감당하는 것이다 ​ 내가 너에게 간다는 것은 언제 화낼지 모르는 너를 감당하는 것이다 ​ 내가 숲에 간다는 것은 숲의 벌레와 해충이라 여기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 내가 너에게 간다는 것은 너의 허물과 단점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해충이라 여기는 벌레도 내 몸에 오래 살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 너의 치명적인 결점도 나에게 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이 될 수도 있다 ​ 내가 바다에 간다는 것은 빠질지 모르는 위험을 알지만 물과 내가 하나 되어 내가 물 속 깊이 가라앉아 내가 영원히 물이 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 ​ ​ ​ 시집 / 가끔은 위로받..

현상 수배 / 이수명

그림 / 서정철 ​ ​ ​ ​ 현상 수배 / 이수명 ​ ​ ​ 그는 현상 수배범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넓은 거리의 게시판에 걸려 있다. ​ 사진 속에서 그는 웃고 있다. 전단지가 햇빛에 누렇게 바래고, 빗물에 얼룩이 져도, 이 손이 뜯고 저 손이 찢어도 웃고 있다. 그는 산산조각나고 있다. 어느 날 한 쪽 눈이 없어지고, 또 어느 날 한 쪽 귀가 사라졌다. 남은 형체도 검은 펜으로 뭉개지고 있다. 그래도 그는 웃고 있다. 그는 위험 인물이다. 그가 저지른 위험한 일들이 어디선가 또 저질러지고 있다. 어디에서? 그는 어디에 있는가? ​ 사진 속에서 그는 웃고 있다. 웃으며 이쪽을 넘보고 있다. 그도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위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현상 수배한다. ​ ​ ​ 이수명 시집 /..

봄일기 / 이해인

그림 / 강진주 ​ ​ ​ 봄일기 / 이해인 ​ ​ 봄에도 바람의 맛은 매일 다르듯이 매일을 사는 내 마음빛도 조금씩 다르지만 쉬임없이 노래했었지 쑥처럼 흔하게 돋아나는 일상의 근심 중에도 희망의 향기로운 들꽃이 마음속에 숨어 피는 기쁨을 언제나 신선한 설레임으로 사랑하는 이를 맞듯이 매일의 문을 열면 안으로 조용히 빛이 터지는 소리 봄을 살기 위하여 내가 열리는 소리 ​ ​ ​ 이해인 시집 / 고운 새는 어디에 숨었을까 ​ ​ ​

​어느 봄날, 백목련 나무 밑에서 / 이경임

그림 / 이연숙 ​ ​ ​ 어느 봄날, 백목련 나무 밑에서 / 이경임 ​ ​ ​ 꽃들은 허공에서 진다 어떤 꽃들은 허공을 만지지 못하지만 이 백목련은 합장을 하며 기도하듯 핀다 ​ 백목련은 하얀 거품이다 백목련은 하얀 거품이 아니다 백목련은 검은 호수가 아니다 ​ 목련은 높은 은신처에 숨어 있다 목련이 늙으면 땅으로 자꾸만 시선이 간다 ​ 목련은 한숨이거나 도취이거나 저항이다 목련은 허공에서 땅까지 영겁 회귀하는 물질이다 ​ 나는 목련꽃에 담긴 너의 강박관념이다 너는 시들어 땅바닥에 뒹굴기 때문에 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 ​ 시집 /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 ​ ​ *꾸준히 철학과 심리학 등의 인문학 전반에 대한 사색을 계속했으며 그 흔적이 녹아든 시집 1998년 이후 두번째 펴낸 펴낸 신작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