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비가 (3) / 이승희

그림 / 장주원 ​ ​ ​ ​ 비가 (3) / 이승희 ​ ​ ​ 너를 만나면 나의 가슴은 항상 물이된다 우수 띤 눈자욱 깊숙한 예감 ​ 온 몸으로 울며 쏟아놓은 마디마디 작은 조각인 양 영혼을 가른다 ​ 타던 가슴 제몫으로 사르고 이별 앞에선 아름다운 단절 ​ 끝내 어둠 내리면 등줄기 흐르는 조용한 비가 등불로 길거리에 내린다 ​ ​ ​ 이승희 시집 / 쓸쓸한 날의 자유 ​ ​ ​ ​

꽃을 보려면 / 정 호 승

그림 / 문지은 ​ ​ ​ ​ 꽃을 보려면 / 정호승 ​ ​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려라 ​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려라 ​ 꽃씨 속에 숨어 있는 어머니를 만나려면 들에 나가 먼저 봄이 되어라 ​ 꽃씨 속에 숨어 있는 꽃을 보려면 평생 버리지 않았던 칼을 버려라 ​ ​ ​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 ​ ​ ​

바람이고 싶다 / 전길중

그림 / 문지은 바람이고 싶다 / 전길중 안개꽃에 둘러싸인 장미꽃 그 속에 잠든 바람이고 싶다 잠시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더우나 추우나 떨림을 지니고 누군가에 안기고 싶은 바람이다 꾸밈없는 얼굴 투명한 마음 신성한 야성 잠시의 멈춤도 허용되지 않아 방향을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떠도는 바람이다 지치면 어느 숲에 머물러 아픔을 다독이는 바람이고 싶다 *바람은 멈추는 순간 죽음이다 시집 / 그까짓게 뭐라고

눈물 선행 / 이상국

그림 / 김창열 눈물 선행 / 이상국 연말이 되어 나도 선행을 했다 누군가 고학생 시절 거저먹은 홍합 한 그릇 값으로 몇십 년 뒤 수백만원을 내놓았다고 한다 눈시울이 젖었다 아, 거리의 뜨거운 홍합 국물 세상에 갚아야 할 게 너무 많은데 나는 얼마나 인색했던지 산다는 게 늘 누군가에게 미안한 일이므로 아무에게나 조금만 잘해주면 되는데 나는 안 하면서 남이 하면 눈물이 난다 *1946년 강원 양양 출생 *1976년 으로 등단 *시집 시선집등이 있다 *2013년 제2회 박재삼문학상 *2012년 정지용 문학상 *2011년 제6회 불교문예작품상 수상

​폭포 / 나호열

​ ​ ​ 폭포 / 나호열 ​ ​ ​ 수만 마리의 푸른 말들이 가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떨어질 때 그때 그 말들은 천마가 된다 천마가 되면서 순간, 산화하는 꽃잎들은 젊은 날 우리들은 얼마나 눈부시게 바라보았던가 아무에게도 배운 적 없는 사랑의 꿈틀거림이 천 길 아래로 우리를 떠밀어내었던가 그 푸른 말들이 하염없이 흘러서 한 가슴을 적시기라도 했단 말인가 ​ 추락이 두려워서 아니 밑바닥까지 추락해버린 한 사내가 폭포를 더듬어 올라가고 있다 물방울들이 수만 마리의 연어들처럼 꿈틀대면서 하늘을 오르는 계단을 헛딛고 있다 얼굴에 엉겨붙은 물보라 그 소리가 하늘에 박혀 있는 새들의 날개처럼 펄럭거린다 ​ 이미 황혼인 것이다 ​ ​ ​ 나호열 시집 / 타인의 슬픔 ​ ​ ​ ​ ​

첫눈 / 조하은

그림 / 바실리 칸딘스키 ​ ​ ​ 첫눈 / 조하은 ​ ​ 육성회비 봉투 비어 있는 채로 들고 간 날 등을 떠민 담임선생님은 빈 봉투 대신 들고 온 날고구마로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 빈 봉투와 생고구마가 날아오르던 교실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의자를 들고 벌을 섰다 ​ 미열이 온몸으로 흘러들어와 마구 돌아다녔다 헛것이 보였다 운동장 귀퉁이 사시나무도 시름시름 앓았다 달아오르는 날이었다 ​ 창밖에는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 ​ ​ ​ 조하은 시집 / 얼마간은 불량하게 *충남 공주 출생 *2015년 (시에티카)로 등단 ​ ​ ​

알맞은 거리 / 나호열

그림 / 알프레드 시슬레 ​ ​ ​ ​ 알맞은 거리 / 나호열 ​ ​ ​ 너는 거기에 나는 이 자리에 ​ 당신 곁에 머물면 화상(火傷)을 입고 당신 곁을 떠나면 동상(凍傷)에 걸린다 ​ 그래서 길이 태어나고 너른 들판이 뛰어오지 눈빛으로 팔을 건네는 아득하지 않은 거리 아늑한 거리 ​ 그 여백은 아쉬움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번지는 점자로 읽는 바람 채찍이 춤추는 알맞은 거리 ​ ​ ​ ​ 나호열/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 있다 (시인 동네) ​ ​ ​ ​

빈잔 / 임성구

그림 / 박지숙 ​ ​ ​ 빈잔 / 임성구 ​ ​ 내 앞에 놓여있는 쓸쓸한 너를 두고 무엇을 채워줄까 고민하다 잠이 들었네 마셔도 비워지지 않는 향긋한 술이 떠도네 ​ 봄은 피고 지고 맵게 울던 매미도 가고 발갛게 익은 가을과 설국의 계절 보내놓고 또다시 한 바퀴의 잔을, 채우면서 웃어보네 ​ 화무에 취해버린 내 잠꼬대에 걷어차여 쏟아진 너의 생애 얼마나 많이 아플까 미안타, 마음 하나 못 채워 헛꽃만 뭉텅 피네 ​ ​ *미안타 : 미안하다 (방언) ​ ​ 임성구 시조집 현대시조 100인선 시집 가 있음 ​ ​ ​ ​

감나무 / 이재무

그림 / 김정수 ​ ​ ​ 감나무 / 이재무 ​ ​ ​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 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 놓고 주인은 삼십 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 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 보는 것이다 ​ ​ ​ ​ 시집 / 애송시 100편 한국 대표 시인이 100명이 추천한 ​ ​ ​ ​

눈부처 / 정호승

그림 / 유영국 ​ ​​ ​ ​ 눈부처 / 정호승 ​ ​ ​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그대는 이 세상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 ​ ​ ​ ​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