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기쁨 Die Freuden / 괴테

그림 / 강민혜 ​ ​ ​ ​​ 기쁨 Die Freuden / 괴테 ​ ​ 우물가에서 잠자리 한 마리 명주 천 같은 고운 날개를 팔랑거리고 있다. 진하게 보이다가 연하게도 보인다. 카멜레온같이 때로는 빨갛고 파랗게, 때로는 파랗고, 초록으로, 아, 가까이 다가가서 그 빛깔을 바로 볼 수 있다면, ​ 그것이 내 곁을 슬쩍 지나가서 잔잔한 버들가지에 앉는다. 아, 잡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음울한 짙은 푸른빛. ​ 온갖 기쁨을 분석하는 그대도 같은 경우를 맞게 되리라. ​ ​ ​ ​ 시집 / Johann Wolfgang von Goethe 괴테 시집 ​ ​ ​ ​ ​

​어떤 싸움의 기록 / 이성복

그림 / 조셉 라이트 ​ ​ ​ 어떤 싸움의 기록 / 이성복 ​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 셔츠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 누나와 작은 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버릴 테야 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버릴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 꽃..

​어스름을 기리는 노래 / 정현종

그림 / 박혜숙 ​ ​ ​ 어스름을 기리는 노래 / 정현종 ​ ​ ​ 땅거미 지면서 세계는 풍부해진다! ​ 어스름에 잠기는 나무들 오래된 석조 건물들 어슴푸레 수은등 불빛 검푸른 하늘이 표구해내는 어스름의 깊이 ​ 어스름은 깊고 깊다 인제 서로 닿지 않는 게 없고 인제 차별이 없다 (풍부하다는 건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내 몸은 지나치게 열려있다 ​ 허공이 그렇듯이, 내 손에 만져지지 않는 거란 없다 물이 그렇듯이...... ​ 한없이 자라는 손 ​ ​ ​ ​ 정현종 시집 / 사랑 할 시간이 많지 않다. ​ ​ ​

종을 만드는 마음으로 / 이어령

그림 / 진옥 ​ ​ ​ 종을 만드는 마음으로 / 이어령 ​ ​ ​ 대장장이가 범종을 만들듯이 그렇게 글을 써라. 온갖 잡스러운 쇠붙이를 모아서 불로 녹인다. 무디고 녹슨 쇳조각들이 형체를 잃고 용해되지 않으면 대장장이는 망치질을 못한다. ​ 걸러서는 두드리고 두드리고는 다시 녹인다. 그러다가 쇳조각은 종으로 바뀌어 맑은 목청으로 운다. 망치로 두드릴 때의 쇳소리가 아니다. ​ 사냥꾼이 한 마리의 꿩을 잡듯이 그렇게 글을 써라. 표적을 노리는 사냥꾼의 총은 시각과 청각과 촉각과 그리고 후각의 모든 감각의 연장(延長)이고 연장(道具)이다. ​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움직이고 숨는 것을 향해 쏘아야 한다. 또 돌진해 오는 것들을 쏘아야 한다. 표적에서 빗나가는 사냥꾼은 총대를 내리지 않고 또다른 숲을 ..

​졸업사진 / 마경덕

그림 / 박혜숙 ​ ​ ​ ​ 졸업사진 / 마경덕 ​ ​ ​ 운동장에 모인 우리들 층층이 나무의자를 쌓고 줄을 맞추고 키 작은 나는 맨 앞줄 가운데 앉았다 얌전히 두 손을 무릎에 얹고 ​ 사진사가 사진을 찍으려는 찰나,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 고무신을 신었으니 뒤로 가라고, ​ 운동화 신은 키 큰 아이를 불러서 내 자리에 앉혔다 ​ 초등학교 앨범을 펼쳐도 맨 뒷줄 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 까치발로 서 있던 부끄러운 그 시간이 흑백사진 속 어딘가에 숨어있다 ​ ​ ​ ​ 마경덕 시집 /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 ​ ​

거울의 습관 / 마경덕

그림 / 김광현 ​ ​ ​ ​ 거울의 습관 / 마경덕 ​ ​ ​ 주름 많은 여자가 주름치마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어요 ​ 얼굴을 마주하면 불편한 거울과 솔직해서 속상한 여자의 사이에 주름이 있습니다 ​ 한때 미모로 주름잡던 여자는 두 손으로 구겨진 얼굴을 펴고 거울은 한사코 나이를 고백합니다 수시로 양미간에 접힌 기분은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 주름진 치마는 몇 살일까요 저 치마도 찡그린 표정입니다 ​ 치마는 주름 이전만 기억하고 얼굴은 왜 주름 이후만 기억하는 걸까요 ​ 거울처럼 매끈해지려는 여자는 굳어진 표정을 마사지로 수선 중입니다 ​ 접혀서 아름다운 건 커튼과 꽃잎, 프릴과 아코디언, 사막의 모래물결, 샤페이, 기다림을 꼽는 손가락.... ​ 거울이 겉주름을 보여줄 때 속주름은 더 깊어집니다 여자..

실패의 힘 / 천양희

그림 / 박혜숙 ​ ​ ​ ​ 실패의 힘 / 천양희 ​ ​ ​ 내가 살아질 때까지 아니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애매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 비가 그칠 때까지 철저히 혼자였으므로 나는 홀로 우월했으면 좋겠다 ​ 지상에는 나라는 아픈 신발이 아직도 걸어가고 있으면 좋겠다 오래된 실패의 힘으로 그 힘으로 ​ ​ ​ ​ 천양희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 ​ ​ ​ ​ 이재호 갤러리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 정현종

그림 / 송태관 ​ ​ ​ ​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 정현종 ​ ​ ​ 싹이 나오고 꽃이 피었어요 나는 부풀고 부풀다가 그냥 태양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뛰어내렸어요 태양에서 (생명의 기쁨이요?) 달에 바람을 넣어 띄우고 땅에도 바람을 넣어 그 탄력 위에서 벙글거렸지요 ​ 인제 할 일은 하나 아주 꽃 속으로 뛰어드는 일, 그야 거기 들어있는 태양들을 내던지겠습니다 향기롭고, 붉고, 푸르게 ​ ​ ​ ​ 시집 / 살아갈 시간이 많지 않다 ​ ​ ​ ​

단추 / 이인주

그림 / 최길용 ​ ​ ​ ​ ​ 단추 / 이인주 ​ ​ ​ 단추의 생명은 구멍이다 그 좁고 캄캄한 구멍속으로 흘러들어간 환한 실오라기들이 얼마나 단단한 결속의 언약인지 ​ 구멍이 없는 것들은 모른다 소통이란 한 가닥 실오라기 같은 것 입술에서 입술로 뚫린 이음줄이 오감을 올려내는 둥근 탄성을 ​ 몸이 열리는 맨 처음의 자리와 마음이 닫히는 맨 끝자리에 단추가 있고 원죄 같은 구멍 속으로 흘러온 역사는 사실 단추의 역사인데 그 풀고 잠그는 형태가 능히 한 서사를 바꾸기도 한다 ​ ​ ​ ​ 시집 / 초중도 ​ ​ ​ ​ 이인주 *2003년 신춘문예 당선 제8회 평사리문학대상 수상, 시집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