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연꽃 / 최두석 그림 / 김혜숙 가시연꽃 / 최두석 자신의 몸 씻은 물 정화시켜 다시 마시는 법을 나면서부터 안다 온몸을 한장의 잎으로 만들어 수면 위로 펼치는 마술을 부린다 숨겨둔 꽃망울로 몸을 뚫어 꽃 피는 공력과 경지를 보여준다 매일같이 물을 더럽히면 사는 내가 가시로 감싼 그 꽃을 훔쳐본다 뭍에서 사는 짐승의 심장에 늪에서 피는 꽃이 황홀하게 스민다. 최두석 시집 / 투구꽃 문학이야기/명시 2022.05.19
내 심장은 너무 작아서 / 잘라루딘 루미 그림 / 오지은 내 심장은 너무 작아서 / 잘라루딘 루미 "내 심장은 너무 작아서 거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그 작은 심장 안에 이토록 큰 슬픔을 넣을 수 있습니까? " 신이 대답했다. "보라, 너의 눈은 더 작은데도 세상을 볼 수 있지 않느냐." 시집 / 시로 납치하다 (류시화 엮음) 김일성 별장 문학이야기/명시 2022.05.18
두번은 없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그림 / 양태모 두번은 없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연습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행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 문학이야기/명시 2022.05.17
부탁 / 고은 그림 / 프레드 시슬레 부탁 / 고은 아직도 새 한마리 앉아보지 않은 나뭇가지 나뭇가지 얼마나 많겠는가 외롭다 외롭다 마라 바람에 흔들려보지 않은 나뭇가지 나뭇가지 어디에 있겠는가 괴롭다 괴롭다 마라 고은 시집 / 내 변방은 어디갔나 문학이야기/명시 2022.05.16
낙화 / 조지훈 그림 / 이경희 낙화 /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시집 / 애송시 100편 문학이야기/명시 2022.05.15
비 / 박준 그림 / 장주원 비 / 박준 그는 비가 내리는 것이라 했고 나는 비가 날고 있는 것이라 했고 너는 다만 슬프다고 했다. 박준 산문집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문학이야기/명시 2022.05.14
이별 Der Abschied / 괴테 그림 / 윤세호 이별 Der Abschied / 괴테 이별의 말은 입이 아닌 눈으로 하리라. 견디기 어려운 이 쓰라림! 언제나 굳건히 살아왔건만. 달콤한 사랑의 징표도 헤어질 때는 슬픔이 되는 것을. 너의 키스는 차가워지고, 너의 손목도 힘이 없으니. 슬쩍 훔친 키스가 그때는 얼마나 황홀했던지! 이른 봄에 꺾었던 오랑캐꽃이 우리들의 기쁨이었던 것처럼. 너를 위해 다시는 꽃도 장미도 꺾지 않으리. 프란치스카여, 지금은 봄이라지만 나는 쌀쌀한 가을 같구나. 괴테 시집 / Johann Wolfgang von Goethe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문학이야기/명시 2022.05.13
소금 성자 / 정일근 낙산해수욕장 소금 성자 / 정일근 히말라야 설산 높은 곳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물속에 숨어 있는 소금을 받아내는 평생 노역이 있다 소금이 무한량으로 넘치는 세상 소금을 신이 내려주는 생명의 선물로 받아 소금을 순금보다 소중하게 모시며 자신의 당나귀와 평등하게 나눠 먹는 사람이 있다. 정일근 시집 / 소금 성자 문학이야기/명시 2022.05.12
봄의 미안 / 이은규 그림 / 송태관 봄의 미안 / 이은규 누가 봄을 열었을까, 열어줬을까 허공에서 새어나온 분홍 한 점이 떨고 있다 바다 밑 안부가 들려오지 않고, 않고 있는데 덮어놓은 책처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말을 반복한다 미안未安 잘못을 저지른 내 마음이 안녕하지 못하는 말 이제 그 말을 거두기로 하자, 거두자 슬플 때 분홍색으로 몸이 변한다는 돌고래를 본 적이 있다 모든 포유류는 분홍분홍 울지도 모른다 오는 것으로 가는 봄이어서 언제나 4월은 기억투쟁 특별구간이다 그렇게 봄은 열리고 열릴 것 인간적인 한에서 이미 약을 선택한 거라고 말한다면 그때 바다에 귀 기울이자 슬픔은 날마다 새로 태어나는 그 무엇이어서 봄은 먼 분홍을 가까이에 두고 사라질 것 성급한.. 문학이야기/명시 2022.05.11
물의 뺨을 쳤다 / 정일근 그림 / 진옥 물의 뺨을 쳤다 / 정일근 산사서 자다 일어나 물 한 잔 떠먹었다 산에서 흘러 돌확에 고이는 맑은 물이었다 물 마시고 무심코 바가지 툭, 던졌는데 찰싹, 물의 뺨치는 소리 요란하게 울렸다 돌확에 함께 고인 밤하늘의 정법과 수많은 별이 제자리를 지키던 율이 사라졌다 죄였다, 큰 죄였다 법당에서 백여덟 번 절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물의 뺨은 퉁퉁 부어 식지 않았다 정일근 시집 / 소금 성자 *경남 진해 출생 *1985년 신춘문예 당선 *시집 *소금 성자는 열두 번째 시집이다 *경남대학 문과대학 문화콘텐즈학과 교수 동강 문학이야기/명시 2022.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