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8 31

국화빵을 굽는 사내 / 정호승

그림 / 최은미 국화빵을 굽는 사내 / 정호승 당신은 눈물을 구울 줄 아는군 눈물로 따끈따끈한 빵을 만들 줄 아는군 오늘도 한강에서는 사람들이 그물로 물을 길어 올리는데 그 물을 먹어도 내 병은 영영 낫지 않는데 당신은 눈물에 설탕도 조금 넣을 줄 아는군 눈물의 깊이도 잴 줄 아는군 구운 눈물을 뒤집을 줄도 아는군 정호승시선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진화론을 읽는 밤 / 나호열

그림 / 강숙란 진화론을 읽는 밤 / 나호열 냉장고에서 꺼낸 달걀은 진화론의 지루한 서문이다 무정란의 하루가 거듭될수록 저 커다란 눈물 한 덩이의 기나긴 내력을 통째로 삶거나 짓이기고 싶은 약탈의 가벼움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비상을 포기한 삶은 안락을 열망한 실수 사막으로 쫓겨 온 낙타 아버지와 초원을 무작정 달리는 어머니 말 그렇게 믿었던 맹목의 날들이 닭대가리의 조롱으로 메아리친다 다시 나를 야생의 숲으로 보내다오 삶에게 쫓기며 동망치다 보면 날개에 힘이 붙고 휘리릭 창공을 박차고 올라 매의 발톱에 잡히지 않으려는 수만 년이 지나면 쓸데없는 군살과 벼슬을 버린 새가 되리라 진화론의 서문이 너무 길어 달걀을 깨버리는 이 무심한 밤 나호열 시집 / 안부

작은 북이 울다 / 김정희

그림 / 문지은 작은 북이 울다 / 김정희 그저 바라보던 티브이 속 그림자 찾기에서 마음을 깨우는 속말이 속삭인다 저게 뭐지 태어날 때부터 걸을 수 없던 자식의 일부가 되어 발길 맞추어 걷고 있는 화면 속 어는 중년 부부의 잔잔한 웃음에 모르는 미소가 슬며시 다가오고 자극적인 것에 물들어 순한 것에 반응하지 않던 심장에 작은 북이 울린다 붉어지는 눈동자에 퍼지는 이슬이 눈짓 손짓에 매달려 펄럭이고 있다 김정희 시집 / 비켜선 너에게 안부를 묻다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 정호승

그림 / 석재은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 정호승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그대 잠들지 말아라 마음이 착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지닌 것보다 행복하고 행복은 언제나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 있나니 차마 이 빈 손으로 그리운 이여 풀의 꽃으로 태어나 피의 꽃으로 잠드는 이여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그대 잠들지 말아라 아무도 슬프지 않도록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붉은 노을 / 신현림

그림 / 윤석희 붉은 노을 / 신현림 다시 열렬히 살기 위한 장엄한 죽음을 보리라 서녘 하늘에 풍금소리처럼 번지는 저 불길, 저 훨훨 타는 거대한 털모자 속에서 한 떼의 새들이 지친 인간들에게 날아오리라 새들은 뜻깊은 세상으로 통하는 긴 터널을 비추고 또 다른 생애의 시작을 알리리라 신현림 시집 /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버려라

조그만 사랑 / 황동규

그림 / 강애란 조그만 사랑 / 황동규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와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김용택이 사랑한 시 / 시가 내게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