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8 31

내 여인이 당신을 생각한다 / 신현림

그림 / 자심 내 여인이 당신을 생각한다 / 신현림 저녁 태양은 빵같이 부풀고 언덕은 아코디언처럼 흘러 내립니다 거리에 북풍이 넘치도록 그녀는 당신을 생각합니다 우연히 만난 길과 알 수 없는 희망에 들뜬 날들을 소리가 아픈 풍금이 북풍따라 노래하고 당신에게서 나던 사막의 붉은 냄새가 몰려옵니다 잠시 바라보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렸나요 그냥 앞에 계시는 것만으로 기쁨에 넘쳐 봤든가요 소중해서 숨긴 애정의 힘이 비탈길을 오르게 합니다 정든 이의 행복을 빌고 하늘에 새들이 날아드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에 헤어져야 합니다 그녀는 당신이 그린 수묵화입니다 수묵화 한 장이 비바람에 젖습니다 뱃사람이 풍랑을 이기며 바다를 밀고 가듯 사람들은 저마다 추억을 견디며 오늘을 건너갑니다 신현림 시집 /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골목이 없어졌다 / 강은교

그림 / 김정수 골목이 없어졌다 / 강은교 거기 가면 넓은 길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마가 파랗던 배추 하나, 뒤꿈치를 들고 잔뜩 앞을 바라보는 소리 노을이 황금빛 날개를 펴며 사-뿐 내려앉는 소리, 붉은 연립주택 옥상, 여자들이 발끝으로 걷는 소리, 돛폭처럼 펄럭이던 빨래 소리.... 거기쯤이면 늘 허리를 펴던 골목길의 바람 소리 참, 질기기도 하지, 땀냄새들 전속력으로 달려오는구나 그대도 수군수군, 그대도 수군수군, 수군수군 빨래 하나가 뛰어온다. 돛대 하나가 뛰어온다, 발자국 하나 발자국 열, 그림자 하나 그림자 열, 헐레 헐레 벌떡 벌떡 벚꽃 그림자 땅과 붙안고 있는 그곳, 이슬비 온 허리 적시는 그곳. 그런데 그 ......골목이 없어졌다. 강은교 시집 /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물류창고 / 이수명

그림 / 채정원 물류창고 / 이수명 그는 창고로 간다고 했다. 창고에 재고가 좀 남았나 살펴본다고 했다. 쓸모없는 일이다.기록상으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살펴보다가 어두운 창고에서 문턱에 걸려 넘어지거나 튀어나온 선반에 머리가 부딪히거나 할 것이다. 이윽고 자신처럼 두리번거리는 사람을 발견하고 같이 두리번거리며 창고를 돌아다닐 것이다 영등포에서 온 김미진 어린이는 방송실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나오면 방송실로 가보겠지 그는 흘러다니는 전파를 이리저리 따라다닐 거라고 했다. 갈라진 콘크리트 바닥 틈으로 전파가 퍼져나가고 그는 끊어졌다 이어졌다하는 전파에서 무얼 찾아내야 하는지 잊어버린 채 목장갑을 끼고 왔다갔다 할 것이다. 자신이 왜 그렇게 흰 목장갑을 끼고 있는지 몰라 장갑 낀 손을 내려..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그림 / 순영 잘 익은 사과 / 김혜순 백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 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 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 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 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시집 / 어느 가..

소녀상 少女像 / 송영택

그림 / 자심 소녀상 少女像 / 송영택 이 밤은 나뭇잎이 지는 밤이다 생각할수록 다가오는 소리는 네가 오는 소리다 언덕길을 내려오는 소리다 지금은 울어서는 안 된다 다시 가만히 어머니를 생각할 때다 별이 나를 내려다보듯 내가 별을 마주 서면 잎이 진다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서 또 가까이서...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누가 고양이 입속의 시를 꺼내 올까 / 최금진

그림 / 이율 누가 고양이 입속의 시를 꺼내 올까 / 최금진 혓바닥으로 붉은 장미를 피워 물고 조심조심 담장을 걷는 언어의 고양이 깨진 유리병들이 거꾸로 박힌 채 날 선 혓바닥을 내미는 담장에서 줄장미는 시뻘건 문장을 완성한다 경사진 지붕을 타 넘으면 세상이 금세 빗면을 따라 무너져 내릴 것 같아도 사람은 잔인하고 간사한 영물 만약 저들이 쳐놓은 포회틀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구름으로 변장하여 빠져나올 것이다 인생무상보다 더 쉽고 허무한 비유는 없으니 이 어둠을 넘어가면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달덩이가 있다 거기에 몸에 꼭 맞는 둥지도 있다 인간에게 최초로 달을 선사한 건 고양이 비유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 흰 접시 위에 싱싱한 물고기 한 마리 올려놓는다 언어는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하늘로 달아..

다소 의심쩍은 결론 / 천양희

그림 / 유영국 다소 의심쩍은 결론 / 천양희 으악새는 새가 아니라 풀이고요 용서대는 누각이 아니라 물고기라네요 날 궂은 날 때까치는 울지 않고요 잠자리는 죽어서도 날개를 접지 않는다네요 길이 없는 숲속에 근심이 없고요 파도 소리 있는 곳에 황홀이 있다네요 물은 절대 같은 물결을 그리지 않고요 돌에도 여러 무늬가 있다네요 시작해야 시작되고요 미쳐야 미친다네요 사람에게 우연인 것이 신에게는 의도적 섭리라네요 이로운 자리보다 의로운 자리가 꽃자리라네요 그러니까 모든 완성은 속박이라네요 천양희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잎 둘이 또는 셋이 / 강은교

그림 / 최정원 잎 둘이 또는 셋이 / 강은교 -향가풍으로 잎 둘이 손을 꼬옥 잡고 산을 넘는다 한 모퉁이 도라가니 옹달샘이 누워있고 두 모퉁이 도라가니 꽃 세송이 피어있네* 산 하나 또 아물었다 아야아- 잎 셋이 손을 꼬옥 꼬옥 잡고 산을 넘는다 *황천무가 에서 인용 강은교 시집 /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별 하나 넣고 다녔다

글자를 놓친 하루 / 천양희

그림 / 자심 글자를 놓친 하루 / 천양희 어느 시인의 시집을 받고 정진하기를 바란다는 문자를 보낸다는 것이 'ㄴ'자를 빼먹고 정지하기를 바란다고 보내고 말았다 글자 한 자 놓친 것 때문에 의미가 정반대로 달라졌다 'ㄴ'자 한 자가 모자라 신(神)이 되지 못한 시처럼 정진과 정지 사이에서 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천양희 시집 / 새벽에 생각하다

파아노 / 전봉건

그림 / 최연재 파아노 / 전봉건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끈임없이 열마리씩 스무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봉건 시집 / 백개의 태양 *전봉건 시인 195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1928년 평남 안주 출생 *1946년 아버지 따라서 월남 *1950년 서정주와 김영랑 추천으로 문단에 나옴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