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2 21

벽돌 쌓기 / 이수명

그림 / 이고르 베르디쉐프 (러시아) ​ ​ ​ 벽돌 쌓기 / 이수명 ​ ​ ​ 비 오는 날이면 나는 벽돌을 쌓는다 한장 한장 눈먼 벽돌을 잠자는 벽돌을 끝없이 높이 쌓는다. 내가 잠들 때까지 내가 고함쳐 벽돌들을 와르르 깨워도 깨진 채 벽돌들이 다시 무거운 잠에 빠지고 나는 그 위에서 고요해질 때까지 벽돌처럼 붉은 침묵의 핏덩이가 될 때까지 그 핏덩이로 굳어버릴 때까지 나는 쌓는다. 비 오는 날이면 죽은 자의 이빨같이 움직이지 않는 벽돌들을 나란히 차곡차곡 가슴속에 쌓는다. 빗물이 스미지 않게 빗물이 나를 맛보지 않게 눈먼 벽돌들을 ​ ​ ​ ​ 이수명 시집 /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 ​ ​ ​

봄눈 / 정호승

그림 / 김 정 수 ​ ​ ​ ​ 봄눈 / 정호승 ​ ​ ​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다른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라 봄눈이 내리면 그대 결코 절벽 위를 무릎으로 걸어가지 말라 봄눈이 내리는 날 내 그대의 따뜻한 집이 되리니 그대 가슴의 무덤을 열고 봄눈으로 만든 눈사람이 되리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였다고 올해도 눈으로 내리는 나의 사람아 ​ ​ ​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 ​

내가 숲에 간다는 것은 / 김율도

그림 / 사영희 ​ ​ ​ 내가 숲에 간다는 것은 / 김율도 ​ ​ 내가 숲에 간다는 것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야생동물을 다 감당하는 것이다 ​ 내가 너에게 간다는 것은 언제 화낼지 모르는 너를 감당하는 것이다 ​ 내가 숲에 간다는 것은 숲의 벌레와 해충이라 여기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이다 ​ 내가 너에게 간다는 것은 너의 허물과 단점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사람들이 해충이라 여기는 벌레도 내 몸에 오래 살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 ​ 너의 치명적인 결점도 나에게 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이 될 수도 있다 ​ 내가 바다에 간다는 것은 빠질지 모르는 위험을 알지만 물과 내가 하나 되어 내가 물 속 깊이 가라앉아 내가 영원히 물이 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 ​ ​ ​ 시집 / 가끔은 위로받..

현상 수배 / 이수명

그림 / 서정철 ​ ​ ​ ​ 현상 수배 / 이수명 ​ ​ ​ 그는 현상 수배범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넓은 거리의 게시판에 걸려 있다. ​ 사진 속에서 그는 웃고 있다. 전단지가 햇빛에 누렇게 바래고, 빗물에 얼룩이 져도, 이 손이 뜯고 저 손이 찢어도 웃고 있다. 그는 산산조각나고 있다. 어느 날 한 쪽 눈이 없어지고, 또 어느 날 한 쪽 귀가 사라졌다. 남은 형체도 검은 펜으로 뭉개지고 있다. 그래도 그는 웃고 있다. 그는 위험 인물이다. 그가 저지른 위험한 일들이 어디선가 또 저질러지고 있다. 어디에서? 그는 어디에 있는가? ​ 사진 속에서 그는 웃고 있다. 웃으며 이쪽을 넘보고 있다. 그도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위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을 현상 수배한다. ​ ​ ​ 이수명 시집 /..

봄일기 / 이해인

그림 / 강진주 ​ ​ ​ 봄일기 / 이해인 ​ ​ 봄에도 바람의 맛은 매일 다르듯이 매일을 사는 내 마음빛도 조금씩 다르지만 쉬임없이 노래했었지 쑥처럼 흔하게 돋아나는 일상의 근심 중에도 희망의 향기로운 들꽃이 마음속에 숨어 피는 기쁨을 언제나 신선한 설레임으로 사랑하는 이를 맞듯이 매일의 문을 열면 안으로 조용히 빛이 터지는 소리 봄을 살기 위하여 내가 열리는 소리 ​ ​ ​ 이해인 시집 / 고운 새는 어디에 숨었을까 ​ ​ ​

​어느 봄날, 백목련 나무 밑에서 / 이경임

그림 / 이연숙 ​ ​ ​ 어느 봄날, 백목련 나무 밑에서 / 이경임 ​ ​ ​ 꽃들은 허공에서 진다 어떤 꽃들은 허공을 만지지 못하지만 이 백목련은 합장을 하며 기도하듯 핀다 ​ 백목련은 하얀 거품이다 백목련은 하얀 거품이 아니다 백목련은 검은 호수가 아니다 ​ 목련은 높은 은신처에 숨어 있다 목련이 늙으면 땅으로 자꾸만 시선이 간다 ​ 목련은 한숨이거나 도취이거나 저항이다 목련은 허공에서 땅까지 영겁 회귀하는 물질이다 ​ 나는 목련꽃에 담긴 너의 강박관념이다 너는 시들어 땅바닥에 뒹굴기 때문에 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 ​ 시집 / 겨울 숲으로 몇 발자국 더 ​ ​ ​ *꾸준히 철학과 심리학 등의 인문학 전반에 대한 사색을 계속했으며 그 흔적이 녹아든 시집 1998년 이후 두번째 펴낸 펴낸 신작 시집..

그래서 그랬다 / 임솔아

그림 / 안호범 ​ ​ ​ ​ 그래서 그랬다 / 임솔아 ​ ​ 살구꽃은 무섭다. 하루 아침에 새까매진다. 가로등 아래서 살점처럼 시뻘겠는데. 살아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보다 무섭다. 유리컵 속에 가둔 말벌이 죽지는 않고 죽어만 간다. ​ 잠그지 않은 가스밸브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내가 무섭다. 아무도 없어서 무섭고 누군가 있을까 봐 더 무섭다. ​ 엄마한테 할 말 없니 엄마의 그 말이 내 말문을 닫는다. ​ 할 말이 없어서 무섭고 할 말이 생길까 봐 더 무섭다. ​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질 때와 같이 무서웠던 것들이 시원하게 풀려나간다. 눈물도 안 나던 순간에 눈물이 갑자기 끝나는 순간에 무섭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에 한 번도 믿어보질 못해서 쉽게 믿어버릴까 봐서 ​ 술 취한 친구의 눈빛과 술 안 취한 ..

장님 / 문태준

그림 / 손 영 숙 ​ ​ ​ ​ 장님 / 문태준 ​ ​ ​ 찔레나무에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그 곁에 오금이 저리도록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의 의혹이 생겼습니다 그대의 가슴은 어디에 있습니까 찔레 덤블 속 같은 곳 헝클어진 곳보다 보다 안쪽 막 눈물이 돌기 시작하는 곳 그곳으로 날아오는 새와 날아오는 구름 그곳으로부터 날아가는 새와 날아가는 구름 ​ ​ ​ 문태준 시집 / 그늘의 발달(2008) ​ ​ ​

생명보험 / 김기택

그림 / 윤지원 ​ ​ ​ 생명보험 / 김기택 ​ ​ ​ 병원마다 장례식장마다 남아도는 죽음, 밥 먹을 때마다 씹히고 이빨 사이에 고집스럽게 끼어 양치질해도 빠지지 않는 죽음이 오늘 밤은 형광등에 다투어 몰려들더니 바닥에 새카맣게 흩어져 있다. ​ 삶은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 하나를 주리라. 무엇이든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두 손은 공짜이므로 넙죽 받을 것이다. 무엇이든 손에 들어오는 것은 일단 움켜쥐고 볼 일이다. 걱정은 나중에 해도 된다. ​ 그렇잖아도 죽음에 투자하라고 부동산 투자보다 훨씬 안전하고 수익도 높다고 투자만 해놓으면 다리 쭉 펴고 맘 놓고 죽을 수 있다고 보험설계사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 죽음에는 다리들이 참 많이 달려 있다. 이젠 길이 땅에서 하늘로 바뀌었다는 듯 하나같이 다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