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1 30

동백꽃 / 문정희

그림 / 박민선 ​ ​ ​ ​ 동백꽃 / 문정희 ​ ​ 나는 저 가혹한 확신주의자가 두렵다 ​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피우지는 않았다 ​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 나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 ​ 전 존재로 내지는 피 묻은 외마디의 시 앞에서 나는 점자를 더듬듯이 절망처럼 난해한 생의 음표를 더듬고 있다 ​ ​ 문정희 시집 / 나는 문이다 ​ ​ ​ ​ ​ 그림 / 김정수

아침 이슬 / 문정희

그림 / 구본준 ​ ​ ​ ​ ​ 아침 이슬 / 문정희 ​ ​ ​ 지난밤 무슨 생각을 굴리고 굴려 아침 풀잎 위에 이렇듯 영롱한 한 방울의 은유로 태어났을까 고뇌였을까, 별빛 같은 슬픔의 살이며 뼈인 생명 한 알 누가 이리도 둥근 것을 낳았을까 고통은 원래 부드럽고 차가운 것은 아닐까 사랑은 짧은 절정, 숨소리 하나 스미지 못하는 순간의 보석 밤새 홀로 걸어와 무슨 말을 전하려고 아침 풀잎 위에 이렇듯 맑고 위태한 시간을 머금고 있는가 ​ ​ ​ ​ ​ 문정희 시집 / 나는 문이다 ​ ​ ​ ​ ​

바다를 본다 / 이생진

그림 / 안호범 ​ ​ ​ ​ 바다를 본다 / 이생진 ​ ​ ​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 ​ ​ 이생진 시집 / 그리운 바다 성산포 ​ ​ ​ ​ ​

살아 있는 심청이 / 김용하

그림 / 강애란 ​ ​ ​ ​ ​ 살아 있는 심청이 / 김용하 ​ ​ ​ 내 짧은 혀끝에 묻어 사는 심청이 대화 속에서 불쑥 살아나온다 ​ 내 속에 눌러 살기엔 사건이 크다 이 시대 아버지를 돈더미로 보는 아들들 딸들이 있기에 연꽃에 숨어 살던 심청이를 밝은 세상에 모두가 볼 수 있는 곳 심어 경작하여 수십만의 가슴에 모종하여 그 열매를 따내야 한다 ​ 흐르는 물 예대로고, 달 그대로 뜨건만 인정은 마를 대로 마르고 정신없는 세상사 이 시대를 지고 갈 심청이가 많으면 좋겠다 ​ 문명의 오솔 길 연꽃의 향으로, 아름다움으로 살아 세상을 꾸리고 장식해 아들이 아버지 되는 내일을 위해 딸이 할머니 되는 훗날을 위해 심청이들이 꾸려가는 세상이 왔으면 하고..... ​ ​ ​ ​ 시집 / 겨울나무 사이 ​ ​ ​..

​삶이 삶을 끌어안네 / 양광모

그림 / 윤지민 ​ ​ ​ ​ 삶이 삶을 끌어안네 / 양광모 ​ ​ 장미는 가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무는 바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 하늘은 노을을 숨기지 않고 별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땅은 비를 슬퍼하지 않고 별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땅은 비를 슬퍼하지 않고 바다는 썰물을 후회하지 않는다 ​ 나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 ​ ​ 양광모 시집 / 가끔 흔들렸지만 늘 붉었다 ​ ​ ​ ​

病 / 기 형 도

그림 / 안 호 범 ​ ​ ​ ​ 病 / 기 형 도 ​ ​ ​ ​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 ​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 ​ ​ ​ 기형도 시집 / 입 속의 검은 잎 ​ ​ ​ ​ ​

​함께 눈물이 되는 이여 / 양광모

그림 / 장 문 자 ​ ​ ​ ​ ​ 함께 눈물이 되는 이여 / 양광모 ​ ​ ​ 낮은 곳에선 모두 하나가 된다 ​ 빗방울이 빗물이 되듯 강물이 바다가 되듯 ​ 나의 마음 자리 가장 낮은 곳까지 흘러와 함께 눈물이 되는 이여 ​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우리 함께 샘물 같은 사랑이 되자 ​ ​ ​ ​ ​ 시집 / 가끔 흔들렸지만 늘 붉었다

드라이버 / 김 용 하

사진 / 이영렬 ​ ​ ​ ​ ​ 드라이버 / 김 용 하 ​ ​ ​ ​ 아무도 할 수 없는 녹슨 못을 돌리고 떨어진 냄비 손잡이 고치고 헤어졌던 볼트 너트 훨거워진 것 꽉꽉 조이고 당겨 이별 없는 세상 만들기 ​ ​ 부둥키고 살다 보면 일평생 잠깐 꿈이 되고 바람이 흩어지는 것을 발밑에 떨어져 느슨하게 풀린 것 별 것 아니라 방심하면 흩어지는 것을..... ​ ​ ​ ​ ​ 시집 / 겨울나무 사이 ​ ​ ​

​바바리맨 / 김태호(충북공고2)

그림 / 구 본 준 ​ ​ ​ ​ 바바리맨 / 김태호(충북공고2) ​ ​ ​ ​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바바리맨. ​ 그 녀석이 지금 내 옆에 있다. ​ 서서히 옷을 벗으며 겨울 준비를 하는 나무들. ​ 모두들 추워 옷을 입을 때 추위쯤 가뿐히 무시하고 서서히 옷을 벗는 나무. ​ 저 나무들이야말로 진정한 상남자, 진정한 이한치한, 진정한 바바리맨. ​ ​ ​ * 우리 시 이야기 / 정진명 ​ ​ ​ *참 재미있는 시를 우연히 발견했다. 여고시절 학교에 가끔 바바리맨이 나타났다. 여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동창회에 나가면 아직도 우리들은 바바리맨 이야기를 한다. 문득 고등학교 남학생이 쓴 시를 읽으면서 잠시 잊고 지냈던 바바리맨을 떠올리면서 피식 혼자서 웃어본다. 바바리맨은 모두가 싫어하는 대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