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1 30

첫사랑 / 류시화

그림 / 이고르 베르디쉐프 ​ ​ ​ ​​ 첫사랑 / 류시화 ​ ​ ​ 이마에 난 흉터를 묻자 넌 지붕에 올라갔다가 별에 부딪친 상처라고 했다 ​ 어떤 날은 내가 사다리를 타고 그 별로 올라가곤 했다 내가 시인의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한다고 넌 불평을 했다 희망 없는 날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난 다만 말하고 싶었다 ​ 어떤 날은 그리움이 너무 커서 신문처럼 접을 수도 없었다 ​ 누가 그걸 옛 수첩에다 적어 놓은 걸까 그 지붕 위의 별들처럼 어떤 것이 그리울수록 그리운 만큼 거리를 갖고 그냥 바라봐야 한다는 걸 ​ ​ ​ ​ ​ ​ 시집 /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 ​ ​ ​ ​ ​ ​

날아라 버스야 / 정현종

그림 / 스타니스라프 바흐발로프 (러시아) ​ ​ ​ ​ 날아라 버스야 / 정현종 ​ ​ ​ ​ 내가 타고 다니는 버스에 꽃다발을 든 사람이 무려 두 사람이나 있다! 하나는 장미- 여자 하나는 국화 - 남자. 버스야 아무데로나 가거라. 꽃다발 든 사람이 둘이나 된다. 그러니 아무데로나 가거라. 옳지 이륙을 하는구나! 날아라 버스야, 이륙을 하여 고도를 높여가는 차체의 이 가벼움을 보아라. 날아라 버스야! ​ ​ ​ ​ ​ 정현종 시집 / 갈증이여 샘물인 ​ ​ ​ ​ ​

거지 / 뚜르게네프 Turgenev

그림 / Alessandro Tamponi ​ ​ ​ ​ ​ 거지 / 뚜르게네프 Turgenev ​ ​ ​ ​ 거리를 걷고 있노라니 늙은 거지 하나가 나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눈물어린 충혈된 눈, 파리한 입술, 다 해진 옷, 더러운 상처, 오오, 가난은 어쩌면 이렇게 처참히 이 사람을 갉아먹는 것일까! 그는 신음하듯 동냥을 청한다. 나는 호주머니를 모조리 뒤져 보았다. 지갑도 없다. 시계도 없다. 손수건마저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거지는 기다리고 있었다. 나에게 내민 그 손은 힘없이 흔들리며 떨리고 있다. 당황한 나머지 나는 힘없이 떨고 있는 그 더러운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용서하시오, 형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려" 거지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파리한 ..

호수 / 이바라기 노리코

그림 / 이고르 베르디쉐프 (러시아) ​ ​ ​ ​ 호수 / 이바라기 노리코 ​ ​ ​ "엄마란 말이야 조용한 시간이 있어야 해" ​ 명대사를 들은 것일까! ​ 되돌아보면 땋은 머리와 단발머리 두 개의 책가방이 흔들리는 낙엽 길 ​ 엄마만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조용한 호수를 가져야한다 ​ 다자와 호수와 같이 푸르고 깊은 호수를 비밀스레 가지고 있는 사람은 ​ 말해 보면 안다 두 마디 세 마디로 ​ 그야말로 조용하고 잔잔한 쉽게 불지도 줄지도 않는 자신의 호수 결코 타인은 갈 수 없는 마의 호수 ​ 교양이나 학력은 아무 상관이 없다 인간의 매력이란 필시 그 호수에서 발생하는 안개다 ​ 빨리도 그것을 눈치챘나 보다 ​ 작은 두 소녀 ​ ​ ​ ​ 시집 /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 ​ ​ ​ ​

저녁의 염전 / 김 경 주

그림 / 전 지 숙 ​ ​ ​ ​ 저녁의 염전 / 김 경 주 ​ ​ ​ ​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 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힌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등에 관하여 푼다 / 박 순

그림 / 최 종 태 ​ ​ ​ ​ ​ 등에 관하여 푼다 / 박 순 ​ ​ ​ ​ 꺾인 허리 반쯤 펴고 들어 올린 들통 엿질금을 물에 담가 불리고 팍팍 문질러 꼬두밥 넣고 불앞에서 밤을 지새운 엄마 밥알이 껍질만 남긴 채 쏙 빠져나오듯 세상에서 젤루 어려운 것이 넘의 맴 얻는 거라며 투닥대지 말고 비위 맞춰 살라고 맴 단단히 붙들고 강단지게 살라고 했다 어여 가거라, 와이퍼처럼 손을 흔들던 겨울비 우산 속 키 작은 엄마는 어둠속으로 묻혀갔다 어매, 어쩌다가 꼬두밥이 되야 불었소 ​ ​ ​ ​ 시집 / 시작 : 시시한 일상이 작품이 될 거야 (출저 : 도봉문화원) ​ ​ ​ ​ ​

천관 (天冠) / 이대흠

그림 / 신미현 ​ ​ ​ 천관 (天冠) / 이대흠 ​ ​ ​ 강으로 간 새들이 강을 물고 돌아오는 저물녘에 차를 마신다 ​ ​ 막 돋아난 개밥바라기를 보며 별의 뒤편 그늘을 생각하는 동안 ​ ​ 노을은 바위에 들고 바위는 노을을 새긴다 ​ ​ 오랜만에 바위와 놀빛처럼 마주 앉은 그대와 나는 말이 없고 ​ ​ 먼 데 갔다 온 새들이 어둠에 덧칠된다 ​ ​ 참 멀리 갔구나 싶어도 거기 있고 ​ ​ 참 멀리 왔구나 싶어도 여기 있다 ​ ​ ​ ​ ​ *전라남도 장흥에 천관산이 있다. 봉우리와 기암 괴석이 솟아오른 모양이 "면류관"과도 같다고 해서 천관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 ​ ​ 문태준 시집 / 시가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것이다 ​ ​ ​ ​ ​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 정호승

그림 / 서순태 ​ ​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 정호승 ​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잠이 든 채로 그대로 눈을 맞기 위하여 잠이 들었다가도 별들을 바라보기 위하여 외롭게 떨어지는 별똥별을 위하여 그 별똥별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어린 나뭇가지들을 위하여 ​ ​ 새들은 지붕을 짓지 않는다 가끔 외로운 낮 달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 민들레 홀씨도 쉬어가게 하고 가끔 인간을 위하여 우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받아둔다 ​ ​ 누구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들의 집을 한번 들여다보라 간밤에 떨어진 별똥별들이 고단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간밤에 흘리신 하느님의 눈물이 새들의 깃털에 고요히 이슬처럼 맺혀있다 ​ ​ ​ ​ 정호승 시집 /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