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2/01 30

깊은 숲 / 강윤후

그림 / 권 선 희 ​ ​ ​ ​ ​ 깊은 숲 / 강윤후 ​ ​ ​ 나무들이 울창한 생각 끝에 어두워진다 김 서린 거울을 닦듯 나는 손으로 나뭇가지를 걷으며 나아간다 깊이 들어갈수록 숲은 등을 내보이며 ​ 멀어지기만 한다 저 너머에 내가 길을 잃고서야 닿을 수 있는 집이라도 한 채 숨어 있다는 말인가 문 열면 바다로 통하는 집을 저 숲은 품에 안고 성큼 성큼 앞서 가는 것인가 마른 잎이 힘 다한 바람을 슬며시 ​ 내려놓는다 길 잃은 마음이 숲에 들어 더 깊은 숲을 본다 ​ ​ ​ ​ 시집 / 다시 쓸쓸한 날에 ​ ​ ​ ​

재활 병원 / 정경화(202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작품 / 고 민 숙 ​ ​ ​ ​ ​ 재활 병원 / 정경화 (2022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 당선작) ​ ​ ​ ​ 바장이던 시간들이 마침내 몸 부린다 한 평 남짓 시계방에 분해되는 작은 우주 ​ ​ 숨 가삐 걸어온 길이 하나 둘씩 드러난다 ​ ​ 시작과 끝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하늘처럼 종종걸음 맞물리는 톱니바퀴 세월 따라 ​ ​ 녹슬고 닳아진 관절 그 앙금을 닦는다 ​ ​ 조이고 또 기름 치면 녹슨 날도 빛이 날까 눈금 위 도돌이표 삐걱거리는 시간 위로 ​ ​ 목 붉은 초침소리를 째깍째깍 토해낸다 ​ ​ ​ ​ ​ *1963년 전남 담양 출생 *호남대 대학원 한국어교육학과 졸업 *호남대 언어 교육원 강사 ​ ​ ​ ​ ​ ​

럭키슈퍼 / 고선경(2022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림 / 이 민 지 ​ ​ ​ 럭키슈퍼 / 고선경 (2022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 ​ ​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바람의 말 / 마종기

그림 / 원 효 준 ​ ​ ​ ​ ​ 바람의 말 / 마종기 ​ ​ ​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 ​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는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 ​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 ​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 ​ ​ *마종기 시인은 동화작가 마해송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

경유지에서 / 채윤희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작품 / 윤 경 주 ​ ​ ​ 경유지에서 / 채윤희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 ​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한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

꽃을 더듬어 읽다 / 김성애

그림 / 이 연 숙 ​ ​ ​ ​ 꽃을 더듬어 읽다 / 김성애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 ​ ​ 리어카와 한 몸으로 꾸뻑이는 할머니 먼 길 걸어오셨나, 가슴이 흘러 내린다 바람은 소리를 접어 산속으로 떠나고 비 맞아 꿉꿉해진 골목들의 이력같이 소나무 우듬지에 걸려있는 저 흰구름 공중의 새를 날려서 주름살 지워낸다 색 바랜 기억들이 토해놓은 노을인가 중복지난 서녘에 붉은 섬 둥둥 띄워 초저녁 봉선화처럼 왔던 길을 되묻고 ​ ​ ​ ​ 꽃을 더듬어 읽다 / 김성애 (2022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 ​ ​ ​

비애에 대하여 / 나 호 열

그림 / 민 경 윤 ​ ​ ​ 비애에 대하여 / 나 호 열 ​ ​ ​ ​ ​ 늙은 베틀이 구석진 골방에 앉아 있다 앞뜰에는 봄꽃이 분분한데 뒤란엔 가을빛 그림자만 야위어간다 몸에 얹혀졌던 수많은 실들 뼈마디에 스며들던 한숨이 만들어내던 수만 필의 옷감은 어디로 갔을까 ​ 나는 수동태의 긴 문장이다 간이역에 서서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급행열차의 꼬리를 뒤따라가던 눈빛이 마침표로 찍힌다 삐거덕거리며 삭제되는 문장의 어디쯤에서 황톳길 읍내로 가던 검정고무신 끌리는 소리가 저무는 귀뚜라미 울음을 닮았다 ​ 살아온 날만큼의 적막의 깊이를 날숨으로 뱉어낼 때마다 베틀은 자신이 섬겼던 주인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 ​ ​ ​ 나호열시집 / 안부 ​ ​ ​ ​ ​ ​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 나 태 주

그림 / 이 은 주 ​ ​ ​ ​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 나 태 주 ​ ​ ​ ​ 서툴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어제 보고 오늘 보아도 서툴고 새로운 너의 얼굴 ​ 낯설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금방 듣고 또 들어도 낯설고 새로운 너의 목소리 ​ 어디서 이 사람을 보았던가... 이 목소리 들었던가... 서툰 것만이 사랑이다 낯선 것만이 사랑이다 ​ 오늘도 너는 내 앞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오늘도 나는 네 앞에서 다시 한 번 죽는다. ​ ​ ​ ​ ​ ​ 시집 / 나태주 대표시 선집 ​ ​ ​ ​

그래서 / 김 소 연

그림 / 최 종 대 ​ ​ ​ ​ ​ 그래서 / 김 소 연 ​ ​ ​ ​ 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 ​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 ​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 ​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 ​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 ​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 ​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

새해의 기도 / 이 성 선

그림 / 이 종 연 ​ ​ ​ ​ ​ 새해의 기도 / 이 성 선 ​ ​ ​ ​ ​ 새해엔 서두르지 않게 하소서. 가장 맑은 눈동자로 당신 가슴에서 물을 긷게 하소서. 기도하는 나무가 되어 새로운 몸짓의 새가 되어 높이 비상하며 영원을 노래하는 악기가 되게 하소서. 새해엔, 아아 가장 고독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이 별 사이로 흐르는 혜성으로 찬란히 뜨는 시간 나는 그 하늘 아래 아름다운 글을 쓰며 당신에게 바치는 시집을 준비하는 나날이게 하소서. ​ ​ ​ ​ 문태준 시집 / 시가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것이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