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1/12 31

부리와 뿌리 / 김 명 철

그림 / 서 순 태 ​ ​ ​ ​ ​ ​ 부리와 뿌리 / 김 명 철 ​ ​ ​ 바람이 가을을 끌고와 새가 날면 안으로 울리던 나무의 소리는 밖을 향한다 나무의 날개가 돋아날 자리에 푸른 밤이 온다 ​ ​ 새의 입김과 나무의 입김이 서로 섞일 때 무거운 구름이 비를 뿌리고 푸른 밤의 눈빛으로 나무는 날개를 단다 ​ ​ 새가 나무의 날개를 스칠 때 새의 뿌리가 내릴 자리에서 휘바람 소리가 난다 나무가 바람을 타고 싶듯이 새는 뿌리를 타고 싶다 ​ ​ 밤을 새워 새는 나무의 날개에 뿌리를 내리며 하늘로 깊이 떨어진다 ​ ​ ​ ​ 김명철 시집 / 짧게, 카운터펀치 ​ ​ ​ ​

비밀의 화원 / 김 소 연

그림 / 서 순 태 ​ ​ ​ ​ ​ ​ 비밀의 화원 / 김 소 연 ​ ​ ​ 겨울의 혹독함을 잊는 것은 꽃들의 특기, 두말없이 피었다가 진다 ​ 꽃들을 향해 지난 침묵을 탓하는 이는 없다 ​ 못난 사람들이 못난 걱정 앞세우는 못난 계절의 모난 시간 ​ 추레한 맨발을 풀밭 위에 꺼내 놓았을 때 추레한 신발은 꽃병이 되었다 ​ 자기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꽃들의 특기, 하염없이 교태에 골몰한다 ​ 나는 가까스로 침묵한다 지나왔던 지난한 사랑이 잠시 머물렀다 떠날 수 있게 ​ 우리에게 똑같은 냄새가 났다 자가밭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 ​ ​ ​ 김소연 시집 / 수학자의 아침 ​ ​ ​ ​ ​

귀와 뿔 / 정 현 우

그림 / 정 현 순 ​ ​ ​ ​ ​ 귀와 뿔 / 정 현 우 ​ ​ 눈 내린 숲을 걸었다. 쓰러진 천사 위로 새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천사를 등에 업고 집으로 데려와 천사를 씻겼다. 날개에는 작은 귀가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귀를 훔쳤다. 귀를 달빛에 비췄고 나는 천사에게 말을 배웠다. 두 귀. 두 개의 깃. 인간의 귀는 언제부터 천사의 말을 잊었을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순간과 타들어가는 귀는 깃을 달아주러 오는 밤의 배려. 인간의 안으로만 자라는 귀는 끝이 둥근 칼날. 되돌려주지 않는 신의 목소리. 불로 맺혔다가 어둠으로 눈을 뜨는 안. 인간에게만 닫혀 있고 새와 구름에게 열려 있다. 목소리를 들으려 할 때 귓바퀴를 맴도는 날갯짓은 인간과 천사의 사이 끼어드는 빛의 귀. 불이 매달려 있다고 말하면 귓..

그네 / 문 동 만

그림 / 이 기 용 ​ ​ ​ ​ ​ 그네 / 문 동 만 ​ ​ ​ ​ 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 그 반동 그대로 앉는다 그 사람처럼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의 중심은 흔들림 흔들림이야말로 결연한 사유의 진동 누군가 먼저 흔들렸으므로 만졌던 쇠줄조차 따뜻하다 별빛도 흔들리며 곧은 것이다 여기 오는 동안 무한대의 굴절과 저항을 견디며 그렇게 흔들렸던 세월 흔들리며 발열하는 사랑 아직 누군가의 몸이 떠나지 않은 그네 누군가의 몸이 다시 앓을 그네 ​ ​ ​ ​ ​ 문동만 시집 / 그네 ​ ​

말은 말에게 가려고 / 이 현 호

그림 / 정 승 은 ​ ​ ​ ​ ​ ​ 말은 말에게 가려고 / 이 현 호 ​ ​ ​ 오늘은 슬픔과 놀아주어야겠다. 가끔 등을 밀어주어야 하는, 그네를 타는 슬픔이 내게도 있다. 한 숟갈 추억을 떠먹는 일로 몇 달쯤 슬픔을 곯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너를 좋아진다." 같은 흰소리를 들어주던 귀의 표정을 생각하는 오늘밤은, 아직 없는 나의 아이나 그 아이의 아이의 눈동자 속으로 걸어오고 있는 별똥도 서넛쯤 있을 것이다. ​ 마음을 놀이터 삼아 혼자 놀던 대견한 슬픔과 놀아야겠다. 떠올릴 적마다 조금씩 투명해지는 얼굴이 있고, 시간같이 익숙해지는 것이 있다. 말은 말에게 닿으려고 말하는데, 빈집 우편함에 쌓이는 편지봉투처럼 누구도 뜯지 않은 말로 시를 적는건 이상한 일이다. 지상과 수평을 이루는 ..

어제 / 천 양 희

그림 / 이 상 표 ​ ​ ​ ​ 어제 / 천 양 희 ​ ​ ​ 내가 좋아하는 여울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왜가리에게 넘겨주고 내가 좋아하는 바람을 나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새에게 넘겨주고 ​ 나는 무엇인가 놓고 온 것이 있는 것만 같아 자꾸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 너가 좋아하는 노을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구름에게 넘겨주고 너가 좋아하는 들판을 너보다 더 좋아하는 바람에게 넘겨주고 ​ 너는 어디엔가 두고 온 것이 있는 것만 같아 자꾸 뒤를 돌아다본다 ​ 어디쯤에서 우린 돌아오지 않으려나보다 ​ ​ ​ 천양희 시집 /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 ​ ​ ​

단풍 드는 날 / 도 종 환

그림 / 민 경 윤 ​ ​ ​ ​ 단풍 드는 날 / 도 종 환 ​ ​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 제 삶이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방하착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 ​ ​ *방하착(放下着)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아라" 마음을 비우다라는 뜻의 불교 용어 ​ ​ ​ 도종환 시집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 ​

​천 년의 문 / 이 어 령

작품 / 송 은 주 ​ ​ ​ ​ 천 년의 문 / 이 어 령 ​ ​ ​ 절망한 사람에게는 늘 닫혀있고 희망 있는 사람에게는 늘 열려 있습니다. 미움 앞에는 늘 빗장이 걸려 있고 사랑 앞에는 늘 돌쩌귀가 있습니다. ​ 천년의 문이 있습니다. 지금 이 문이 이렇게 활짝 열려 있는 까닭은 희망과 사랑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 새 천 년은 오는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것입니다. 새 천 년은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입니다. ​ 빗장 없는 천 년의 문이 이렇게 활짝 열려 있는 것은 미움의 세월이 뒷담으로 가고 아침 햇살이 초인종 소리처럼 문 앞에 와 있는 까닭입니다. ​ ​ ​ ​ 이어령 시집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 ​

그 꽃의 기도 / 강은교

그림 / 조 청 수 ​ ​ ​ ​ 그 꽃의 기도 / 강은교 ​ 오늘 아침 마악 피어났어요 내가 일어선 땅은 아주 조그만 땅 당신이 버리시고 버리신 땅 나에게 지평선을 주세요 나에게 산들바람을 주세요 나에게 눈 감은 별을 주세요 그믐 속 같은 지평선을 그믐 속 같은 산들바람을 그믐 속 같은 별을 내가 피어 있을 만큼만 내가 일어서 있을 만큼만 내가 눈 열어 부실 만큼만 내가 꿈꿀 만큼만 ​ ​ ​ ​

호박(琥珀)속의 모기 / 권 영 하(2012 농민 신문 시조 당선작)

출처 / NAVER ​ ​ ​ 호박(琥珀)속의 모기 / 권 영 하 (2012 농민 신문 시조 당선작) ​ ​ ​ 호박(琥珀) 속에 날아든 지질시대 모기 한놈 목숨은 굳어졌고 비명도 갇혀 있다 박제된 시간에 갇혀 강울음은 딱딱하다 멈추는 게 비행보다 힘드는 모양이다 접지 못한 양날개, 부릅뜬 절규의 눈 온몸에 깁스한 관절 마디마디 욱신댄다 은밀히 펌프질로 흡협할 때 달콤했다 빨알간 식욕과 힘, 그대로 몸에 박고 담황색 심연 속에서 몇 만년을 날았을까 전시관에 불을 끄면 허기가 생각나서 호박 속의 모기는 이륙할지 모르겠다 살문향(殺蚊香) 피어오는 도심을 공격하러 ​ ​ ​ ​ *1965년 경북 영주 출생 *문경시 점촌 중학교 교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