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1/12 31

밤, 바람 속으로 / 나 희 덕

작품 / 김 광 호 ​ ​ ​ ​ 밤, 바람 속으로 / 나 희 덕 ​ ​ ​ ​ 아버지 저를 업었지요. 별들이 멀리서만 반짝이던 밤 저는 눈을 뜬 듯 감은 듯 꿈도 깨지 않고 등에 업혀 이 세상 건너갔지요. 차마 눈에 넣을 수 없어서 꼭꼭 씹어 삼킬 수도 없어서 아버지 저를 업었지요. 논둑길 뱀딸기 밑에 자라던 어린 바람도 우릴 따라왔지요 어떤 행위로도 다할 수 없는 마음의 표현 업어준다는 것 내 생의 무게를 누군가 견디고 있다는 것 그것이 긴 들판 건너게 했지요. 그만 두 손 내리고 싶은 세상마저 내리고 싶은 밤에도 저를 남아 있게 했지요. 저는 자라 또 누구에게 업혔던가요. 바람이 저를 업었지요. 업다가 자주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지요. ​ ​ ​ ​

밤 눈 / 기 형 도

그림 / 소 순 희 ​ ​ ​ ​ 밤 눈 / 기 형 도 ​ ​ ​ ​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 ​ ​ ​ ​ 기형도 시집 ..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 권혁웅

그림 / 영 희 ​ ​ ​ ​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 ​/ 권혁웅 ​ ​ ​ ​ 지금 애인의 울음은 변비 비슷해서 두 시간째 끊겼다 이어졌다 한다 몸 안을 지나는 긴 울음통이 토막 나 있다 신의주 찹쌀순대 2층, 순댓국을 앞에 두고 애인의 눈물은 간을 맞추고 있다 그는 눌린 머리고기처럼 얼굴을 눌러 눈물을 짜낸다 새우젓이 짜부라든 그의 눈을 흉내 낸다 나는 당면처럼 미끄럽게 지나간 시간의 다발을 생각하고 마음이 선지처럼 붉어진다 다 잘게 썰린 옛날 일이다 연애의 길고 구부정한 구절양장을 지나는 동안 우리는 빨래판에 치댄 표정이 되었지 융털 촘촘한 세월이었다고 하기엔 뭔가가 빠져 있다 지금 마늘과 깍두기만 먹고 견딘다 해도 동굴 같은 내장 같은 애인의 목구멍을 다시 채워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버..

비망록 / 문 정 희

그림 / 송 영 신 ​ ​ ​ ​ 비망록 / 문 정 희 ​ ​ ​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 ​ 가난한 식사 앞에서 기도를 하고 밤이면 고요히 일기를 쓰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구겨진 속옷을 내보이듯 매양 허물만 내보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 ​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있고 ​ ​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허둥거린다. ​ ​ ​ ​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 ​ ​ ​ ​ ​ ​ ​ ​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먼가 / 조인성

그림 / 최 현 정 ​ ​ ​ ​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먼가 / 조인성 ​ ​ ​ ​ 오후 4시 역광을 받고 담벼락에 휘는 그림자는 목이 가늘고 어깨가 좁다 고아처럼 울먹이는 마음을 데리고 타박타박 들어서는 골목길 ​ ​ 담장 너머엔 온몸에 눈물을 매단 듯, 반짝이는 대추나무 새잎 ​ ​ 저에게 들이친 폭설을 다 건너서야 가까스로 다다랐을 새 빛 대추나무 앙상한 외곽에서 저 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멀까 ​ 잎새 한잎, 침묵의 지문 맨 안쪽 돌기까지는 얼마나 아득한 깊이일까 글썽이는 수액이 피워올린 그해 첫 연둣빛 불꽃까지는 ​ ​ ​ ​ 조인성 시집 / 장미의 내용 ​ ​ ​ ​ ​ ​ ​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이규리

그림 / 서 순 태 ​ ​ ​ ​나무가 나무를 모르고 / 이규리 ​ 공원 안에 있는 살구나무는 밤마다 흠씬 두들겨맞는다 이튿날 가보면 어린 가지들이 이리저리 부러져 있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가 깨진 채 떨어져 있다 새파란 살구는 매실과 매우 흡사해 으슥한 밤에 나무를 때리는 사람이 많다 ​ 모르고 때리는 일이 맞는 이를 더 오래 아프게도 할 것이다 키 큰 내가 붙어 다닐 때 죽자고 싫다던 언니는 그때 이미 두들겨맞은 게 아닐까 키가 그를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내가 평생 언니를 때린 건 아닐까 ​ 살구나무가 언니처럼 무슨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매실나무도 제 딴에 이유를 따로 남기지 않았지만 그냥 존재하는 것으로도 서로 아프고 서로 미안해서, 가까운 것들을 나중에 어느 먼 곳에서 만나면 미운 정 고운 정,..

밥해주러 간다 / 유안진

작품 / 서 윤 제 ​ ​ ​ ​ ​ 밥해주러 간다 / 유안진 ​ ​ ​ 적신호로 바뀐 건널목을 허둥지둥 건너는 할머니 섰던 차량들 빵빵대며 지나가고 놀라 넘어진 할머니에게 성급한 하나가 목청껏 야단친다 ​ ​ 나도 시방 중요한 일 땜에 급한 거여 주저앉은 채 당당한 할머니에게 할머니가 뭔 중요한 일 있느냐는 더 큰 목청에 ​ ​ 취직 못한 막내 눔 밥해주는 거 자슥 밥 먹이는 일보다 더 중요한게 뭐여? 구경꾼들 표정 엄숙해진다 ​ ​ ​ ​ ​ ​ * 유안진 시인 약력 *1941년 경북 안동 출생 *서울대 (명예교수) *1965년 등단 *1970년 첫 시집 *1975년 *1998년 10회 정지용 문학상 *1990년 *2000년 *2013년 6회 목월문학상 수상 *2012년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 ​ ..

가뜬한잠 / 박 성 우

그림 / 박 미 영 ​ ​ ​ 가뜬한잠 / 박 성 우 ​ ​ ​ 곡식 까부는 소리리가 들려왔다 ​ 둥그렇게 굽은 몸으로 멍석에 차를 잘도 비비던 할머니가 정지문을 열어놓고 누런 콩을 까부르고 있었다 키 끝 추슬러 잡티를 날려보내놓고는 ​ 가뜬한 잠을 마루에 뉘었다 ​ 하도 무섭게 조용한 잠이어서 생일 밥숟갈 놓고 눈을 감은 외할매 생각이 차게 다녀간다 ​ ​ ​ *박성우 시집 / 가뜬한 잠 ​ ​ ​ 박성우 시인 약력 *1971년 전북 정읍 *원광대 문예창작과 졸업, 동대학원석,박사 *2000년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 ​ 그림 / 박 미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