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말은 말에게 가려고 / 이 현 호

푸른 언덕 2021. 12. 7. 20:00

그림 / 정 승 은

 

말은 말에게 가려고 / 이 현 호

 

오늘은 슬픔과 놀아주어야겠다. 가끔 등을 밀어주어야 하는, 그네를 타는 슬픔이 내게도 있다. 한 숟갈 추억을 떠먹는 일로 몇 달쯤 슬픔을 곯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너를 좋아진다." 같은 흰소리를 들어주던 귀의 표정을 생각하는 오늘밤은, 아직 없는 나의 아이나 그 아이의 아이의 눈동자 속으로 걸어오고 있는 별똥도 서넛쯤 있을 것이다.

 

마음을 놀이터 삼아 혼자 놀던 대견한 슬픔과 놀아야겠다. 떠올릴 적마다 조금씩 투명해지는 얼굴이 있고, 시간같이 익숙해지는 것이 있다. 말은 말에게 닿으려고 말하는데, 빈집 우편함에 쌓이는 편지봉투처럼 누구도 뜯지 않은 말로 시를 적는건 이상한 일이다. 지상과 수평을 이루는 높이까지 발을 차올렸던 슬픔이 되돌아오고 있다.

"나도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사랑해."라는 말을 수박씨처럼 툭툭 뱉어보는 오늘밤도, 유성우에 빌었던 소원은 도착하지 않는다. 집 앞에 쓸어져 있던 절름발이 바람을 방금 전 나는 그냥 지나친 듯도 하다. 씨앗 하나를 안으려고 지구는 중력을 놓지 않는다, 라는 말을 곱씹고 있었다. 뒤돌아보는 슬픔의 얼굴이 나를 좋아진다. 저 가벼운

등을 밀어주어야지. 채찍질로 떠나보낸 말들이 기특하게도 다시 돌아오는 오늘밤은

 

이현호 시집 / 아름다웠던 이름은 혼자

<문학동네 시선집>

 

이현호 시인 약력

*1983 충남 출생

*2007 <현대시> 등단

*시집 <라이터 좀 빌립시다>

<아름다웠던 이름은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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