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촉도(蜀道) / 나 호 열

​ 촉도(蜀道) / 나 호 열 경비원 한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 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 * 시집

릴케의 장미

김 민 정 ​ 릴케는 1615년 체코 프라하에서 출생한다. 독일로 귀화한 릴케는 많은 여성에게 인기를 얻는다. 그러나 살로메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호수 같은 맑은 눈동자, 백옥 같은 흰 피부, 단아하고, 기품 있고, 도도한 루 살로메에게 청혼을 하지만 돌아온 답은 "스승으로는 존경하지만 애인으로는 사랑할 수 없다"였다. 그러나 릴케는 죽는 날까지 그녀를 사랑한다. 릴케는 장미꽃을 꺾으려다 장미꽃 가시에 찔린 것이 화근이 되어서 51세의 한창나이에 죽음을 맞이한다. 살로메를 생각하면서 쓴 시가 6월의 장미다. ​ ​ 유월의 장미 / 릴케 ​ 그대의 편지는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알고 있어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모든 아름다움 속에서 그대는 내게로 다가왔다 그대, 모든 길이 있는 유월의 장미여..

거룩한 식사 / 황 지 우

거룩한 식사 / 황 지 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게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황지우 시집

장미를 사랑한 이유 / 나 호 열

그림 : 김 정 수 ​ ​ 장미를 사랑한 이유 / 나 호 열 ​ 꽃이었다고 여겨왔던 것이 잘못이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고통이었다 슬픔이 깊으면 눈물이 된다 가시가된다 눈물을 태워 본 적이 있는가 한철 불꽃으로 타오르는 장미 불꽃의 심연 겹겹이 쌓인 꽃잎을 떼어내듯이 세월을 버리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처연히 옷을 벗는 그 앞에서 눈을 감는다 마음도, 몸도 다 타버리고 난 후 하늘을 향해 공손히 모은 두 손 나는 장미를 사랑한다 ​ ​ *나호열 시인 충북 서천 출신 (1954) 경희대 대학원 철학(박사) 졸업 시집 : 이 세상에 가장 슬픈 노래를 알고있다 당신에게 말걸기 타인의 슬픔 안녕, 베이비 박스 수상 : 중견 신인상 (1986) 녹색 신인상 (2004) 한민족 문학상 (2007) 한..

정(情) / 홍 해 리

그림 : 이 혜 경 ​ ​ 정(情) / 홍 해 리 ​ 어느새 성긴 머리 애처롭고 눈가에 지는 가선 가엽고 언짢아서, ​ 거친 피부 안쓰럽고 무디어진 두 손 보기 딱해서, ​ 푸석거리는 뼈마디 아프고 쓰리고 쑤시는 삭신 슬프고 서러워서, ​ 밤낮없이 두통으로 고생하는 너, 서러워서 나는 못 보네 ​ ​ ​ 홍해리 시집 : 중에서 ​ *홍해리 시인 약력 충북 청원 출생 1964년 고려대 영문과 졸업 2006년 시집 출간 출간 2008년 시집 시선집 출간 2010년 시집 출간

낙화, 첫사랑 / 김 선 우

다니엘 리즈웨이 나이트 ​ ​ 낙화, 첫사랑 / 김 선 우 ​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 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 ​ *김선우 시인 약력 강원 강릉 출생 등단 : 대관령 옛길 외 10편 (창작과 비평) 등단 시집 : 내 혀가 입속에 갇혀있길 거부한..

사랑한다 / 정 호 승

​ 사랑한다 / 정 호 승 ​ 밥그릇을 들고 길을 걷는다 목이 말라 손가락으로 강물 위에 사랑한다라고 쓰고 물을 마신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리고 몇날 며칠 장대비가 때린다 도도히 황톳물이 흐른다 제비꽃이 아파 고개를 숙인다 비가 그친 뒤 강둑 위에서 제비꽃이 고개를 들고 강물을 내려다 본다 젊은 송장 하나가 떠내려 오다가 사랑한다 내 글씨에 걸려 떠내려가지 못한다 ​ 정호승 시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의문들 / 심보 선

​ 의문들 / 심 보 선 ​ 나는 즐긴다 장례식장의 커피처럼 무겁고 은은한 의문들을: 누군가를 정성 들여 쓰다듬을 때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본다면 서글플까 언젠가 누군가를 환영할 준비가 된 고독은 가짜 고독일까 일촉즉발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삶은 전체적으로는 왜 지루할까 몸은 마음을 산 채로 염(殮) 한 상태를 뜻할까 내 몸이 자꾸 아픈 것은 내 마음이 원하기 때문일까 누군가 서랍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꺼내먼 서랍은 토하는 기분이 들까 내가 하나의 사물이라면 누가 나의 내면을 들여다봐줄까 층계를 오를 때마다 왜 층계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까 숨이 차오를 때마다 왜 숨을 멎고 싶은 생각이 들까 오늘이 왔다 내일이 올까 바람이 분다 바람이여 광포해져라 하면 바람은 아니어도 누군가 광포해질까 말하자면 혁명은..

동백꽃 / 이 수 복

이 효 ​ 동백꽃 / 이 수 복 ​ 동백꽃은 훗시집 간 순아 누님이 매양 보며 울던 꽃. 눈 녹은 양지쪽에 피어 집에 온 누님을 울리던 꽃. 홍치마에 지던 하늘 비친 눈물도 가냘프고 씁씁하던 누이의 한숨도 오늘토록 나는 몰라. 울어야던 누님도 누님을 울리던 동백꽃도 나는 몰라 오늘토록 나는 몰라. 지금은 하이얀 촉루가 된 누님이 매양 보며 울던 꽃 빨간 동백꽃. ​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