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죄와 벌 / 김 수 영

​ 죄와 벌 / 김 수 영 ​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사십 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것과 죽일 만큼 미워하는 마음이 함께 공존한 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김수영, 아내는 이종구 (선린상고 선배)랑 살림을 차렸다. 이종구가 죽자 김수영 곁으로 돌아왔다. 그후부터 아내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이 시를 쓰고난 후에 학대가 끝났다. 폭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더 이상 사..

겨울 나무 / 장 석 주

​ 겨울 나무 / 장 석 주 ​ 잠시 들었다 가는 길입니다 외롭고 지친 발걸음 멈추고 바라보는 빈 벌판 빨리 지는 겨울 저녁 해걸음 속에 말없이 서있는 흠없는 혼 하나 당분간 폐업합니다 이 들끓는 영혼을 잎사귀를 떼어 버릴 때 마음도 떼어 버리고 문패도 내렸습니다 그림자 하나 길게 끄을고 깡마른 체구로 서 있습니다. ​ ​ * 장석주 시인 약력 소설가, 시인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심야" 등단 2010 질마재 문학상 (1회) ​

그 겨울의 시 / 박 노 해

그 겨울의 시 / 박 노 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는데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시인 박노해의 본명은 박기평 한동안 이름 없는 시인, 실체없는 시인으로 알려졌던 시절이 있었던 사람이다. 첫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이름을 알린 시인이다. 시집: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우리가 물이 되어 / 강 은 교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숮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이 작품은 강은교 시인이 젊은 시절에 쓴 시다. 고달픈 인생에 대해서, 허무한 사랑에 대해서 시인은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이 시를 따라서 읽으면서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 호 승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 호 승 ​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는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 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 사랑하는 사람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이 내린다 ​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

연어 / 정 호 승

연어 / 정 호 승 바다를 떠나 너의 손을 잡는다 사람의 손에게 이렇게 따뜻함을 느껴본 것이 그 얼마 만인가 거친 폭포를 뛰어넘어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단지 한 마리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누구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동안 바다는 너의 기다림 때문에 항상 깊었다 이제 나는 너에게 가까이 다가가 산란을 하고 죽음이 기다리는 강으로 간다 울지 마라 인생을 눈물로 가득 채우지 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죽음은 아름답다 오늘 내가 꾼 꿈은 네가 꾼 꿈의 그림자일 뿐 너를 사랑하고 죽으러 가는 한낮 숨은 별들이 고개를 내밀고 총총히 우리를 내려다본다 이제 곧 마른 강바닥에 나의 은빛 시체가 떠오르리라 배고픈 별들이 오랜만에 나를 ..

타이탄 아룸 / 박 순

​ 타이탄 아룸 / 박 순 ​ 칠 년에 한 번씩 꽃피우는 타이탄 아룸 몸에서는 36도 열을 발산한다 동물 썩는 냄새가 난다 저 꽃, 칠 년 기다림으로 단 이틀을 견디다 점 하나로 스러져 갈 뿐이다 꽃잎보다 더 큰 기둥만 한 중심을 세우기 위해 시체 냄새를 피웠으리라 어찌 좋은 냄새만 갖고 살 수 있을까 당신과 타협하지 못한 가슴은 썩어 문드러진다 가슴 앓이는 악취를 내며 입과 코를 움켜쥐게 한다 누군가는 나의 냄새를 좋아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튕겨져 나오려는 시간 속에 중심을 세우려 애를 쓴다 ​ ​ *적도 부근의 열대우림에 자생, 시체꽃으로 불림 ​ ​ *아주 가까운 지인이 시집을 출간했다. *박순 시인 : 강원도 홍천 출생 2015 등단 서울시립뇌성마비복지관 작문 교실 강사 자운 문학회 동인 ..

놓치다 / 송 영 희

놓치다 / 송 영 희 김장 배추 모종을, 일주일이나 넘기고 심었다 핑계가 왜 없으랴 아픈 이의 병간호 때문이라고 그때 위중한 시기였다고 뒤늦은 까닭을 땅에게 하늘에게 고하며 백여 포기를 꼼꼼하게 비닐 구멍마다 물 듬뿍 주며 심었다 배추가 실하게 자라긴 잘 자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무농약으로 적당히 벌레도 먹고 배추흰나비도 날아오고 이파리 색깔도 보기 좋게 푸르렀다 허나 옹이가 생기지를 않는 것 시간이 지나도 그 결구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 속이 안 차는 빈방이었다 두둥실 떠오르는 달이 만월이 되어야 우주의 기운이 성하듯 아 그 절정의 에로틱한 꽃잎들이 기다려도 기다려도 생기지 않는 거였다 후회스럽고 애가 타도 때를 놓친 그 한끝 때문에, 천기 때문에 우주를 감싸고 있는 분홍빛 그 신방의 불이 켜지지 ..

하늘 같은 나무 / 임 영 석

하늘 같은 나무 / 임 영 석 밤이면 천태산 은행나무 어둠보다 더 어둡게 서서 개똥벌레 한 마리 몸속에 들인다 개똥벌레 한 마리 들었을 뿐인데 밤이면 밤마다 반짝반짝 빛나는 하늘 같은 나무가 되어 있다 하느님이 아니어도 부처님이 아니어도 하늘이 될 수 있다는 걸 어둠 속에 서서 매일매일 보여주신다 시집 : 하늘 같은 나무 (천태산 은행나무 시 모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