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 호 승

푸른 언덕 2020. 12. 14. 17:45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 호 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는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 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이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문학이야기 >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겨울의 시 / 박 노 해  (0) 2020.12.17
우리가 물이 되어 / 강 은 교  (0) 2020.12.17
꽃의 이유 / 마 종 기  (0) 2020.12.08
연어 / 정 호 승  (0) 2020.12.01
타이탄 아룸 / 박 순  (0) 2020.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