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 정인성 그냥 / 정인성 산다는 것이 그냥 창문 여닫는 일 정도였으면 합니다 겹겹이 껴입은 옷처럼 불편한 하루 아침밥 먹는 일도 비가 오는 날도 그냥 그렇게 가벼운 산책하기였으면 합니다 시집 31인, 후회를 말하다 전원문학회는 1968년 부산 시내 고교 문예부원들 중 뜻있는 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다. 1기부터 27기까지 열정으로 50년 간 그 인연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문학이야기/명시 2020.11.09
바람의 집(겨울 판화 1) / 기형도 바람의 집(겨울 판화 1) / 기형도 내 유년 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 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 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요 저 울음 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깔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 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십 장 입김이 날리던 날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기형도 시집 문학과 지성 문학이야기/명시 2020.11.06
미안하다 / 정 호 승 미안하다 / 정 호 승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려면 첩첩 연봉을 넘어야 한다. 먼 길을 가야 한다. 단 한 사람에게 가는 사랑의 여정은 만만하지 않다. 게다가 아무리 바쁘게 가더라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매번 늦은 때가 된다. 산봉우리를 넘어, 끝없는 길을 가서 너에게 다다르지만 너의 눈시울이 젖고, 울고 있다. 너무 늦게 이른 것이다. 시인은 "사랑해서 미.. 문학이야기/명시 2020.11.04
사라진 입들 / 이 영 옥 사라진 입들 / 이 영 옥 잠실 방문을 열면 누에들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어두컴컴한 방안을 마구 두드리던 비, 눈 뜨지 못한 애벌레들은 언니가 썰어주는 뽕잎을 타고 너울너울 잠들었다가 세찬 빗소리를 몰고 일어났다 내 마음은 누가 갉아먹었는지 바람이 숭숭 들고 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이 통통하게 살아 오를 동안 언니는 생의 급물살을 타고 허우적거렸고 혼자 잠실방을 나오면 눈을 찌를 듯한 환한 세상이 캄캄하게 나를 막아섰다 저녁이면 하루살이들이 봉창 거미줄에 목을 매러 왔다 섶 위로 누에처럼 얕은 잠에 빠진 언니의 숨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명주실 같았다 허락된 잠을 모두 잔 늙은 누에들은 입에서 실을 뽑아 제가 누울 관을 짰지만 고치를 팔아 등록금으로 쓴 나는 눈부신 비단이 될 수 없.. 문학이야기/명시 2020.11.01
나이 든 고막 / 마종기 나이 든 고막 / 마종기 싱싱하고 팽팽한 장구나 북같이 소리가 오면 힘차게 불러주던 고막이 이제는 곳곳에 늙은 주름살만 늘어 느슨하게 풀어진 채 소리를 잘 잡지 못한다. 나이 들어 윤기도 힘도 빠진 한 겹 살, 주위에서는 귀 검사를 해보라고 하지만 그런 것 안 해도 알지, 내가 의사 아닌가. 그보다 늙은 고막이 오히려 고마운걸. 시끄러운 소리 일일이 듣지 않아도 되고 잔소리에 응답을 안 해도 되는 딴청, 언제부턴가 깊고 은은한 소리만 즐겨 듣는다. 멀리서 오는 깨끗한 울림만 골라서 간직한다. 내 끝이 잘 보이는 오늘 같은 날에는 언젠가 들어본 저 사려 깊은 음성이 유난히 크게 울리는 사랑스러운 내 귀. 문학이야기/명시 2020.10.29
청춘의 기습 / 이병율 빅토르 바스네초프 청춘의 기습 / 이병율 그런 적 있을 것입니다 버스에서 누군가 귤 하나를 막 깠을 때 이내 사방에 가득 채워지고 마는 누군가에게라도 벅찬 아침은 있을 것입니다 열자마자 쏟아져서 마치 바닥에 부어놓은 것처럼 마음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잃었다면 주머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계산하는 밤은 고역이에요 인생의 심줄은 몇몇의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집니다 넘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습니까 저절로 익어 떨어뜨려야겠다는 질문이 하나쯤은 있습니까 돌아볼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부리로 쪼아서 거침없이 하늘에 내던진 새가 어쩌면 전생에 자신이었습니다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문학이야기/명시 2020.10.26
강물에 대한 예의 / 나 호 열 센강변 (알프레드 시슬레) 강물에 대한 예의 / 나 호 열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 이야기인지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하리 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 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 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을 벗을 뿐 추억을 버릴 때도 그리움을 씻어낼 때도 여기 서 있었으나 한번도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구나 팽팽하게 잡아당긴 물살이 잠시 풀릴 때 언뜻언뜻 비치는 눈물이 고요하다 강물에 돌을 던지지 말 것 그 속의 어느 영혼이 아파할지 모르므로 성급하게 건너가려고 발을 담그지 말 것 우리는 이미 흘러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완성되는 순간 허물어져 버리는 완벽한 죽음이 강물로 현현되고 있지 않은가 문학이야기/명시 2020.10.25
소나무는 푸르다 소나무는 푸르다 / 고재종 소나무 한 그루 진즉에 있었으니 소나무는 거기 그대로 뜨락에 푸르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노래해도 소나무는 거기 그대로다 소나무는 곡선이 생명이 매 소나무는 몸을 한 번 더 뒤틀었으면, 바래어도 소나무는 거기 푸르다 바람을 빗질하는가, 가만한 소나무 숫눈을 뒤집어쓰는가, 가만한 소나무 홀로 허공 청람을 머리에 인 소나무 거기 머무는 소이연이랄 것도 없이 소나무는 내가 자꾸 작란하여도 소나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없이 소나무는 진즉에 소나무는 지금 거기 그대로 푸른가? 문학이야기/명시 2020.10.23
서천 호박꽃 서천 호박꽃 / 박 수 봉 서천 변두리 순댓국집에 꽃이 피었다 김이 오르는 순댓국을 앞에 놓고 오가는 목소리가 붉게 익어간다 황무지 묵은 밭에 뿌리내리느라 굵어진 팔뚝이 스스럼없이 잔을 건네온다 닳아빠진 손톱에 수줍은 다섯잎이 분홍으로 피었다 거친 바닷바람 주렁주렁 매달고 흙먼지 뽀얀 벼랑 같은 삶, 백일홍 꽃잎 붉은 것을 알겠다며 하얀 이를 드러낸다 붉어진 달이 담을 넘던 날 꽃술을 더듬고 간 호박별이 있었다고 창을 열어 새파란 호박 두 덩이를 보여준다 화심 깊숙이 몸 씻고 들어앉으며 솜털까지 물들 것 같은 노란 화엄의 품 문학이야기/명시 20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