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젖은 눈망울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모든 것에는 겉으로 나타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뒷면 혹은 이면이 있다. 그리하여 상반된 것들이 짝을 이룬다. 문학이야기/명시 2020.08.20
너에게 너에게 / 신동엽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지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 터 새순 돋듯 허구많은 자연 중 너는 이 근처 와 살아라 문학이야기/명시 2020.08.14
바이킹 (2020 신춘문예) 바이킹 / 고명재 선장은 낡은 군복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그냥 대충 타면 된다고 했다 두려운 게 없으면 함부로 대한다 망해가는 유원지는 이제 될 대로 되라고 배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 모터 소리와 함께 턱이 산에 걸렸다 쏠린 피가 뒤통수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원래는 저기 저쪽 해 좀 보라고 여유 있는 척 좋아한다고 외치려 했는데 으어어억 하는 사이 귀가 펄럭거리고 너는 미역 같은 머리칼을 얼굴에 감은 채 하늘 위에 뻣뻣하게 걸려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포가 되었다 나는 침을 흘리며 쇠 봉을 잡고 울부짖었고 너는 촛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보면서 무슨 대다라니경 같은 걸 외고 있었다 삐걱대는 뱃머리 양쪽에서 우리는 한 번도 서로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다가갈 때 너는 민들레처럼 머리칼을 펼치며 날아가 .. 문학이야기/명시 2020.08.11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문학이야기/명시 2020.08.09
기다림의 시 기다림의 시 / 양성우 그대 기우는 그믐달 새벽별 사이로 바람처럼 오는가 물결처럼 오는가 무수한 불면의 밤, 떨어져 쌓인 흰꽃 밟으며 오는 그대 정든 임 그윽한 목소리로 잠든 새 깨우고 눈물의 골짜기 가시나무 태우는 불길로 오는가 그대 지금 어디쯤 가까이 와서 소리 없이 모닥불로 타고 있는가 문학이야기/명시 2020.08.07
사랑하는 까닭 사랑하는 까닭 / 한용훈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루어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기루다 (그리워한다) 문학이야기/명시 2020.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