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내가 여전히 나로 남아야 함은

내가 여전히 나로 남아야 함은 / 김기만 끝없는 기다림을 가지고도 견뎌야만 하는 것은 서글픈 그리움을 가지고도 살아야만 하는 것은 소망 때문이요 소망을 위해서이다 그대 사랑하고부터 가진 게 없는 나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며 보냈던 많은 날 가을 하늘에 날리는 낙엽처럼 내겐 참 많은 어둠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내가 여전히 나로 남아야 함은 아직도 널 사랑하기 때문이요 내가 널 잊어버릴 수 있는 계절은 아직도 만나지 못한 까닭이요 그리고 뒤돌아설 수 있는 뒷모습을 아직 준비하지 못한 까닭이다.

촉도

촉도(蜀道) / 나 호 열 경비원 한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 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 시집 『촉도』 (2015)

뼈에 새긴 그 이름

뼈에 새긴 그 이름 / 이 원 규 그대를 보낸 뒤 내내 노심초사하였다 행여 이승의 마지막일지도 몰라 그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기만 해도 갈비뼈가 어긋나고 마른 갈잎이 흔들리며 그 잎으로 그대의 이름을 썼다 청둥오리 떼를 불러다 섬진강 산 그림자에 어리는 그 이름을 지우고 벽소령 달빛으로 다시 전서체의 그 이름을 썼다 별자리들마저 그대의 이름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바꿔 앉는 밤 화엄경을 보아도 잘 모르는 활자들 속에 슬쩍 그 이름을 끼워서 읽고 폭설의 실상사 앞 들녘을 걸으면 발자국, 발자국들이 모여 복숭아뼈에 새긴 그 이름을 그리고 있었다 길이라면 어차피 아니 갈 수 없는 길이었다.

구름에게

구름에게 / 나호열 구름이 내게 왔다 아니 고개를 들어야 보이는 희미한 입술 문장이 될 듯 모여지다가 휘리릭 새떼처럼 흩어지는 낱말들 그 낱말들에 물음표를 지우고 느낌표를 달아주니 와르르 눈물로 쏟아지는데 그 눈물 속에 초원이 보이고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저녁이 보인다 구름이 내게 왔다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름을 부르면 사슴도 오고 꽃도 벙근다 구름의 화원에 뛰어든 저녁 해 아, 눈부셔라 한 송이 여인이 붉게 타오른다, 와인 한 잔의 구름 긴 머리의 구름이 오늘 내게로 왔다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땅에게 바침

땅에게 바침 / 나호열 당신은 나의 바닥이었습니다 내가 이카루스의 꿈을 꾸고 있던 평생 동안 당신은 내가 쓰러지지 않도록 온몸을 굳게 누이고 있었습니다 이제야 고개를 숙이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이 보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내 눈물이 바닥에 떨어질 때에도 당신은 안개꽃처럼 웃음 지었던 것을 없던 날개를 버리고 나니 당신이 보입니다 바닥의 힘으로 당신은 나를 살게 하였던 것을 쓰러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