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촉도

푸른 언덕 2020. 7. 9. 18:38

촉도(蜀道) / 나 호 열

경비원 한씨가 사직서를 내고 떠났다
십 년 동안 변함없는 맛을 보여주던 낙지집 사장이
장사를 접고 떠났다
이십 년 넘게 건강을 살펴주던
창동피부비뇨기과 원장이 폐업하고 떠났다

내 눈길이 눈물에 가닿는 곳
내 손이 넝쿨손처럼 뻗다 만 그곳부터
시작되는 촉도

손때 묻은 지도책을 펼쳐놓고
낯선 지명을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이 적막한 날에
정신 놓은 할머니가 한 걸음씩 밀고 가는 저 빈 유모차처럼
절벽을 미는 하루가
아득하고 어질한 하늘을 향해 내걸었던
밥줄이며 밧줄인 거미줄을 닮았다

꼬리를 자른다는 것이 퇴로를 끊어버린 촉도
거미에게 묻는다

* 시집 『촉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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