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집에 대하여

집에 대하여 / 안도현 손에 흙 하나 묻히지 않고 집을 갖는다는 것은 저 제비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볏짚 한 오라기 엮어 앉지 않고 진흙으로 한 톨 물어다 바르지 않고 너나없이 창문 큰 집을 원하는 것은 세상에 그만큼 훔치고 싶은 것이 많기 때문인가 허구한 날 공중에 데서 살아가다 보면 내 손으로 땅 위에 집을 한 채 초가삼간이라도 지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혹시 바람에 찢기고 무너진다 해도 훗날 내 자식새끼들이 자라면 꽁지깃을 펴고 실폐하지 않는 집을 다시 지을 테니까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이정하 그대 굳이 알은척하지 않아도 좋다 찬비에 젖어도 새잎은 돋고 구름에 가려도 별은 뜨나니 그대 굳이 손 내밀지 않아도 좋다 말 한 번 건네지도 못하면서 마른 낙엽처럼 잘도 타오른 나는 혼자 뜨겁게 사랑하다 나 스스로 사랑이 되면 그뿐 그대 굳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기다리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 안도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불꺼진 간이역에 서 있지 말라 기다림이 아름다운 세월은 갔다 길고 찬 밤을 건너가려면 그대 가슴에 먼저 불을 지피고 오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비로서 싸움이 아름다울 때가 왔다. 구비구비 험한 산이 가로막아 선다면 비껴 돌아가는 길을 피하지 말라 산이 무너지게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함성이 기적으로 울 때까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는 그대가 바로 기관차임을 느낄 때까지

생각의 비늘 1

생각의 비늘 1 / 황 은 경 새벽 강을 걸어보라 시원하고 청량한 매력에 빠질 것이다 안개는 강가의 수호신 물길이 할 일을 알려준다 바닥부터 물 위까지 흐르는 것은 건지고 널려진 것은 모으고 죽은 것은 살리고 살아 있는 것은 먹이고 쌓이는 시간을 맞아 잠들 것이다 물고기 한 마리 여명의 윤슬 되고 빛나는 비늘 옷을 입고 바위를 탁탁 치며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낙타의 눈물

낙타의 눈물 / 김 남 권 바람이 얼어 있다 서해에서 시작된 바람이 선자령 정상에서 주문진 포구를 바라보며 직립해 있다 58년 동안 고비사막을 걸어오느라 등이 사라진 낙타가 흰 수염을 휘날리며 정지해 있다 이미 늙어버린 바람의 허리가 페이지가 없는 책장을 넘기다 물안개 속으로 묻히고 말았다 천 길 어둠이 하얗게 밀려왔다 점봉산을 걸어 내려온 새벽이 지작나무의 옷을 벗기는 아침 하늘도 뜨거운 옷을 벗었다

너를 위하여

너를 위하여 / 김남조 나의 밤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뜨는 건 믿을 수 없을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뒷짐

뒷짐 / 문 인 수 국도에서 바닷가를 향해 갈라지는 길 입구에, 한 할아버지가 힘겹게 발거름을 떼고 있다. 잔뜩 꼬부라진 허리 때문에 길이 오히려 노인의 배꼽 쪽으로,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느라 여러 굽이 시꺼멓게 꿈틀대며 애를 먹는다. 우리는 휑하니 차를 몰아 이곳 저곳 포구를 돌아보고 올망졸망한 섬 풍경 앞에 내려 히히거리다 다시 국도 쪽으로 나왔다. 그 갈림길 입구, 거기서 이제 겨우 삼백미터 앞에서 또 한참 전에 지나친 노인을 만났다. 지팡이도 없는 더딘 발걸음의 저 오랜 말씀 ㄱ자의 짐은 ㄱ자다. 흐린 시선으로 짚어낸 길바닥엔 시시각각 채 썬 중심이 촘촘하겠다. 그 등허리에 실려 낱낱이 외로운 열 손가락, 두 손끼리 가끔 매만지며 느리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