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3 30

사랑은 / 나호열

그림 / 김선옥 ​ ​​ ​ 사랑은 / 나호열 ​ 사랑은 꽃이 아니다 꽃 지고 난 후의 그 무엇 사랑은 열매가 아니다 열매 맺히고 난 후의 그 무엇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이 지상에 처음으로 피어나는 꽃 이 지상에 마지막으로 맺히는 열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 ​ ​ ​ 나호열 시집 / 바람과 놀다 ​ ​ ​

석류 / 앙브루아즈 폴 투생 쥘 발레리

그림 / 기용 ​ ​ ​ 석류 / 앙브루아즈 폴 투생 쥘 발레리​ ​ ​ 알맹이들의 과잉에 못 이겨 방긋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아, 숱한 발견으로 파열한 지상의 이마를 보는 듯하다! ​ 너희들이 감내해온 나날의 태양이, 오 반쯤 입 벌린 석류들아, 오만으로 시달림받는 너희들로 하여금 홍옥의 칸막이를 찢게 했을지라도, ​ 비록 말라빠진 황금의 껍질이 어떤 힘의 요구에 따라 즙 든 붉은 보석들로 터진다 해도, 이 빛나는 파열은 내 옛날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스러운 구조를 꿈에 보게 한다. ​ ​ ​ *시집 / 세계의 명시 ​ ​​ ​ ​​ ​

녹슨 도끼의 시 / 손택수

그림 / 권순창 ​ ​ ​​ ​ 녹슨 도끼의 시 / 손택수 예전의 독기가 없어 편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날카로운 턱선이 목살에 묻혀버린 이 흐리멍덩이 어쩐지 쓸쓸하다 가만히 정지해 있다 단숨에 급소를 낚아채는 매부리처럼 불타는 쇠번개 소리 짝, 허공을 두쪽으로 가르면 갓 뜬 회처럼 파들파들 긴장하던 공기들, 저미는 날에 묻어나던 생기들 애인이었던 여자를 아내로 삼고부터 아무래도 내 생은 좀 심심해진 것 같다 꿈을 업으로 삼게 된 자의 비애란 자신을 여행할 수 없다는 것, 닦아도 닦아도 녹이 슨다는 것 녹을 품고 어떻게 녹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녹스는 순간들을 도끼눈을 뜬 채 바라볼 수 있을까 혼자 있을 때면 이얍, 어깨 위로 그 옛날 천둥 기합소리가 저절로 터져나오기도 하는 것인데, 피시식 알아서 눈치껏 ..

바다와 나비 / 김기림

그림 / 김선옥​ ​ ​ ​ 바다와 나비 / 김기림 ​ ​ ​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 청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 시리다 ​ ​ ​ 김기림 시집 / 바다와 나비 ​ ​ ​ ​ ​ ​

손님처럼 / 나태주

그림 / 유진선 ​ ​ ​ 손님처럼 / 나태주 ​ ​ ​ 봄은 서럽지도 않게 왔다가 서럽지도 않게 간다 ​ 잔치집에 왔다가 밥 한 그릇 얻어먹고 슬그머니 사라지는 손님처럼 떠나는 봄 ​ 봄을 아는 사람만 서럽게 봄을 맞이하고 또 서럽게 봄을 떠나보낸다 ​ 너와나의 사랑도 그렇지 아니하랴 사랑아 너 갈 때 부디 울지 말고 가거라 ​ 손님처럼 왔으니 그저 손님처럼 떠나거라. ​ ​ ​ ​ 나태주 대표시선집 / 걱정은 내 몫이고 사랑은 네 차지 ​ ​ ​

수선화 / 윌리엄 워즈워스

그림 / 이경주 ​ ​ ​​ ​ 수선화 / 윌리엄 워즈워스 ​골짜기와 산 위를 떠도는 구름처럼 외로이 떠돌다가 떼지어 활짝 핀 황금빛 수선화를 문득 나는 보았네. 호숫가 줄지어 선 나무 밑에서 하늘하늘 미풍에 춤추는 것을. ​은하에서 반짝이는 별들처럼 이어져 수선화는 강기슭에 끝없이 줄지어 뻗어 있었네. 나는 한눈에 보았네, 흥겹게 춤추며 고개를 살랑대는 무수한 수선화를. ​호수도 옆에서 춤을 추지만 반짝이는 물결보다 더욱 흥겹던 수선화. 이렇듯 즐거운 벗과 어울릴 때 즐겁지 않은 시인이 있을까. 나는 그저 보고 또 바라볼 뿐 그 광경이 얼마나 값진 것임을 미처 몰랐었네. ​어쩌다 하염없이 또는 시름에 잠겨 자리에 누워 있으면 수선화는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고독의 축복. 그럴 때면 내 가슴 기쁨에 넘쳐..

봄의 서곡 / 정해란

그림 / 이경주 ​ ​ ​ 봄의 서곡 / 정해란​ ​ ​ 동토 딛고 선 인고의 시간이 끝날 무렵 식물들은 저마다 뭉친 수다를 풀어내려 곳곳이 가렵다 ​ 한파 속에서도 여전히 형형한 눈빛의 햇살에 두근거리는 생명들 이곳저곳 꼼지락거리며 뒤척이나 보다 ​ 잔설로 언 땅이 스멀스멀 다시 일어서고 수면이 두껍게 멈춘 물의 노래가 다시 흐르고 있다 ​ 갇혀있던 색들이 고개 들고 묶여있던 향기가 풀려나는 봄 기다리던 마음들도 징검다리 건너 자박자박 방향 찾아 마음속 꽃까지 환하게 피워냈으면 ​ 봄의 시작 모든 무게 벗은 가벼운 음표가 햇살의 첫 발자국처럼 경쾌하다 ​ ​ ​ 정해란 시집 / 시간을 여는 바람 ​ ​ ​​ ​

팝니다, 연락주세요 / 최금진

그림 / 후후 ​ ​ ​ 팝니다, 연락주세요 / 최금진​ ​ ​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서 콩팥을 팝니다 전화주세요,를 보다가 나는 내 장기를 팔아 노후를 준비하듯 우리나라를 조금씩 떼어서 해외로 수출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될 것이다 당겨쓴 카드빚과 텅 빈 통장을 생각하면 개인이 겪는 슬픔 따윈 아무것도 아닌 다수의 다수를 위한 두루마리화장지처럼 계속 풀려나오는 누구가의 슬픈 낙서 앞에서 나라가 있어야 개인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말자 누군가 나를 좀 팔아다오 나도 그에게 가서 기꺼이 삼사만원의 현찰이 되어줄 테니 의지할 곳 하나도 없이 늙어가는 건달들아 제 손금을 들여다 보지 마라 거기엔, 낳으시고 기르신 부모님 은혜가 없다 그 손으로 태극기 앞에서 맹세할 의무가 없다 변기통의 물을 내리고 씩씩하..

나는 속였다 / 헤르만 헤세

그림 /은둔자와 잠자는 안젤리카(공주) ​ ​ ​ 나는 속였다 / 헤르만 헤세 ​ ​ 나는 속였다. 나는 늙지 않았다. 인생에도 아직 지치지 않았다.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은 모두 맥백과 가슴을 뛰놀게 한다. ​ 나는 꿈에서 본다. 정열에 넘치는 벌거숭이 계집들을. 좋은 계집과 나쁜 계집을, 흥분한 왈츠의 흥겨운 박자를 사랑을 속삭이던 많은 밤들을. ​ 성스런 첫사랑의 애인과 같은 말없이 아름답고 아주 순결한 그런 애인도 꿈에서 본다. 그녀를 위하여 울 수도 있다. ​ ​ ​ ​ 시집 / 헤르만 헤세 시집 (송영택 옮김) ​ ​ ​ ​ ​

산낙지를 위하여 / 정호승

그림 / 신범승 산낙지를 위하여 / 정호승 신촌 뒷골목에서 술을 먹더라도 이제는 참기름에 무친 산낙지를 먹지 말자 낡은 프라스틱 접시 위에서 산낙지의 잘려진 발들이 꿈틀대는 동안 바다는 얼마나 서러웠겠니 우리가 산낙지의 다리 하나를 입에 넣어 우물우물거리며 씹는 동안 바다는 또 얼마나 많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겠니 산낙지의 죽음에도 품위가 필요하다 산낙지는 죽어가면서도 바다를 그리워한다 온몸이 토막난 채로 산낙지가 있는 힘을 다해 꿈틀대는 것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바다의 어머니를 보려는 것이다 정호승 시선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