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3 30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그림 / 이소윤 나의 마을이 설원이 되는 동안 / 이예진 금값이 올랐다 언니는 손금을 팔러갔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부터 따로 살 거란다 내가 어릴 때, 동화를 쓴 적이 있다 내가 언니의 숙제를 찢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언니도 화가 나서 엄마의 가계부를 찢었고 엄마는 아빠의 신문을 찢고 아빠는 달력을 찢다가, 온 세상에 찢어진 종이가 눈처럼 펄펄 내리며 끝난다 손금이 사라진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집에 남고 싶은 것은 정말로 나 하나뿐일까? 언니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더는 찢을 것이 없었다 눈이 쌓이고 금값이 오르고 검은 외투를 꽁꽁 여민 사람들이 거리를 쏘아 다녔다 엄마는 결국 한 돈짜리 목걸이를 한 애인을 따라갔지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오겠다고 했다 따로 따로 떨어지는 ..

낮은 곳으로 / 이정하

그림 / 이효선 ​ ​ ​ 낮은 곳으로 /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든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 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이정하 시집 /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 ​ ​ ​

초봄의 뜰 안에 / 김수영

그림 / 다비드자맹 ​ ​ ​ ​ 초봄의 뜰 안에 / 김수영 ​ ​ 초록의 뜰 안에 들어오면 서편으로 난 난간문 밖의 풍경은 모름지기 보이지 않고 ​ 황폐한 강변을 영혼보다도 더 새로운 해빙의 파편이 저 멀리 흐른다 ​ 보석 같은 아내와 아들은 화롯불을 피워 가며 병아리를 기르고 짓이긴 파 냄새가 술 취한 내 이마의 신약神藥처럼 생긋하다 ​ 흐린 하늘에 이는 바람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른데 옷을 벗어 놓은 나의 정신은 늙은 바위에 앉은 이끼처럼 추워라 ​ 겨울이 지나간 밭고랑 사이에 남은 고독은 신의 무재주와 사기라고 하여도 좋았다 ​ ​ ​ 시집 / 너에게 주고픈 아름다운 시 ​ ​ ​ ​ ​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그림 / 정규설 ​ ​ ​ ​ 부치지 않은 편지 / 정호승 ​ ​ 풀잎은 쓰러져서 하늘을 보고 꽃 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랑과 죽음의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흘러 그대 잘 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 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 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라보지 말고 그대 잘 가라 ​ ​ ​ ​ 시집 / 너에게 주고픈 아름다운 시 ​ ​ ​ ​ ​

별 하나 / 도종환

그림 / 다비드자맹 별 하나 / 도종환 흐린 차창 밖으로 별 하나 따라온다 참 오래되었다 저 별이 내 주의를 맴돈 지 돌아보면 문득 저 별이 있다 내가 별을 떠날 때가 있어도 별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 별처럼 있고 싶다 상처받고 돌아오는 밤길 돌아보면 문득 거기 있는 별 하나 괜찮다고 나는 네 편이라고 이마를 씻어주는 별 하나 이만치의 거리에서 손 흔들어주는 따뜻한 눈빛으로 있고 싶다 시집 / 너에게 주고픈 아름다운 시

​일요일에 심장에게 / 쉼보르스카

그림 / 조영진 ​ ​ ​ ​ 일요일에 심장에게 / 쉼보르스카 ​ ​ ​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보채지도, 소란을 피우지도 않아서. 타고난 성실함과 부지런함에 대해 그 어떤 보상도, 아첨도 요구하지 않아서. ​ 너는 1분에 70번의 공로를 세우고 있구나. 네 모든 수축은 마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조각배를 바다 한가운데로 힘차게 밀어내는 것 같구나. ​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한 번, 또 한 번, 나를 전체에서 분리시켜줘서, 심지어 꿈에서조차 따로 있게 해줘서. ​ 내가 늦잠을 자지 않고 비행시간을 맞출 수 있게 해줘서, 날개가 필요 없는 비행 말야. ​ 내 심장아, 정말 고맙다, 내가 또다시 잠에서 깨어날 수 있게 해주어서. 비록 오늘은 일요일, 안식을 위해 마련된 특별한 날이지만, 내 갈비뼈..

살아 있어서 감사 / 김재진​

그림 / 홍종구 ​ ​ ​ ​ 살아 있어서 감사 / 김재진​ ​ ​ ​ 안 난 줄 알았는데 새순이 나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파랗게 산천을 물들이네. 아픈 세상살이 이와 같아서 바닥인 줄 알았는데 더 내려가네. 다내려간 줄 알았는데 창이 뚫리네. 겨우 열린 창 틈으로 먼 하늘 보며 때로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감사, 살아 있어서 감사 ​ ​ ​ ​ 김재진 시집 /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 블친님들 ^^ 개인적인 사정으로 5일 동안 답방이 어렵습니다. 매일 오셔서 시 한 편 읽고 가시기 바랍니다. ​ ​ ​​ ​ ​ ​ ​ ​ ​ ​

사랑을 묻거든 / 김재진​​

그림 / 국중길 ​ ​ ​ ​ 사랑을 묻거든 / 김재진​ ​ ​ ​ 사랑을 묻거든 없다고 해라. 내 안에 있어 줄어들지 않는 사랑은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니 누가 사랑했냐고 묻거든 모르겠다고 해라. 아파할 일도 없으며 힘들어할 일도 없으니 누가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거든 나를 적시며 흘러가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강물이라고 해라. ​ ​ ​ 김재진 시집 /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 * 블친님들 ^^ 개인적인 사정으로 5일 동안 답방이 어렵습니다. 매일 오셔서 시 한 편 읽고 가시기 바랍니다. ​ ​ ​ ​ ​

연못 위에 쓰다 / 안도현​​

그림 / 김현주 ​ ​ ​ 연못 위에 쓰다 / 안도현​ ​ ​ 당신을 병상에 버리고 당신은 유리창 넘어로 저를 버리고 ​ 저는 밤마다 아무도 읽지 않을 이야기를 썼죠 ​ 마당 가에 연못을 들였고요 당신이 꽃의 모가지를 따서 한 홉쯤 말려서 소포로 보내주신다면 꽂잎을 물 위에 뿌려놓고 꽃잎이 물속으로 가라앉을 때까지 바라보려 했죠 ​ 당신은 오래 죽은 척 가만히 누워 있었죠 발톱을 깎아 달라는 청을 들어주지 못했어요 ​ 연못가에 앉아 제 발등을 바라보는 동안 풀이 시들고 바람이 사나워지고 골짜기 안쪽에 눈이 몰려왔어요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내고 면사무소가서 이름을 지웠지요 ​ 저는 이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

꽃의 비밀 / 문태준

그림 /유진선 꽃의 비밀 / 문태준 숨을 쉬려고 꽃은 피어나는 거래요 숨 한 번 쉬어 일어나서 일어나서 미풍이 되려고 피어나는 거래요 우리가 오카리나를 불던 음악 시간에 꽃들은 더욱 보드랍게 피어났지요 꽃밭에서 꽃들은 서로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 홍조를 얹고 호흡을 주고받고 서로의 입구가 되었지요 꽃들은 낮밤과 계절을 잊고 사랑하며 계속 피어났지요 문태준 시집 /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 블친님들 ^^ 개인적인 사정으로 5일 동안 답방이 어렵습니다. 매일 오셔서 시 한 편 읽고 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