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3/03 30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그림 / 유해랑 ​ ​ ​ 스며드는 것 / 안도현​ ​ ​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에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다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바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 저녁이야 불끄고 잘 시간이다 ​ ​ ​ 안도현 시집 / 간절하게 참 철없이 ​ ​ ​ * 블친님들 ^^ 개인적인 사정으로 5일 동안 답방이 어렵습니다. 매일 오셔서 시 한 편 읽고 가시기 바랍니다. ​ ​ ​ ​ ​ ​ ​

바다를 본다 / 이 생 진

그 림 / 후후 바다를 본다 / 이 생 진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 성산포 에서는 한 마리의 소도 빼놓지 않고 바다를 본다 한 마리의 들쥐가 구멍을 빠져나와 다시 구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바다를 본다 평생 보고만 사는 내 주제를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이생진 시집 / 그리운 바다 성산포

한강, 심장은 춤추고 싶다 / 이 효

그림 / 김정래​ ​ ​ ​ ​ 한강, 심장은 춤추고 싶다 / 이 효 ​ 물새 발자국 따라가니 천년 뱃사공 노래 흐른다 한강의 싱싱했던 눈 아파트 병풍에 둘러싸여 백내장 걸린다 푸른빛을 잃어버린 백제의 유물처럼 건져 올린 죽은 물고기 떼, 녹슨 비늘 펄펄 뛰던 꿈은 비린 표정 비누 거품 집어삼킨 물고기들 점점 부풀어 오른 탄식 맑게 흘러가야 사람이고 강물이지 강물을 빠른 우편으로 부친다 ​ ​ ​ ​ 월간 신문예 (4월호) ​ ​ ​ ​

뜻밖의 만남 / 쉼보르스카

그림 / 박대현 ​ ​ ​ 뜻밖의 만남 / 쉼보르스카​ ​ ​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공손하게 대하며, 오랜만에 만나서 매우 기쁘다고 말한다. ​ 우리의 호랑이들은 우유를 마신다. 우리의 매들은 걸어 다닌다. 우리의 상어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댄다. 우리의 늑대들은 훤히 열린 철책 앞에서 하품을 한다. ​ 우리의 독뱀은 번개를 맞아 전율하고, 원숭이는 영감 때문에, 공작새는 깃털로 인해 몸을 부르르 떤다. 박쥐들이 우리의 머리 위로 멀리 날아가버린 건 또 얼마나 오래전의 일이던가. ​ 문장을 잇다 말고 우리는 자꾸만 침묵에 빠진다. 무력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 인간들은 대화하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 ​ ​ 쉼보르스카 시선집 / 끝과 시작 ​ ​ ​​ ​ 그림 / 김정수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 종 해

그림 : 김 미 영 ​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김 종 해 ​ ​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살아가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 시집 : 그대 앞에 봄이 있다 ​ ​

서커스의 동물 / 쉼보르스카

그림 / 김정래 ​ ​ ​ 서커스의 동물 / 쉼보르스카​ ​ ​ 곰이 리듬에 맞춰 탭 댄스를 춘다, 사자가 풀쩍 뛰어올라 불타는 고리를 통과한다, 원숭이가 금빛 망토를 걸치고 자전거를 탄다, 휙휙 채찍 소리, 쿵짝쿵짝 음악소리, 휙휙 채찍 소리, 동물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코끼리가 머리 위에서 물병을 이고 우아하게 행진한다, 강아지들이 춤을 추며 신중하게 스텝을 밟는다. ​ 인간인 나, 심히 부끄러움을 느낀다. ​ 그날 사람들은 유쾌하게 즐기지 못했다. 그래도 박수 소리만큼은 요란하기 짝이 없다. 비록 채찍을 손에 쥔 기다란 내 팔이 모래 위에 날카로운 그림자를 드리웠어도. ​ ​ 쉼보르스카 시선집 / 끝과 시작 ​ ​ ​ ​​ ​ ​

한 사람의 진실 / 류시화

그림 / 다비드 자맹 ​ ​ ​ 한 사람의 진실 / 류시화 ​ ​ 한 사람이 진실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이 진실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진실한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진실한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 모두가 거짓을 말해도 세상에 필요한 것은 단 한사람의 진실 모든 새가 날아와 창가에서 노래해야만 아침이 오는 것이 아니므로 한 마리 새의 지저귐만으로도 눈꺼풀에 얹힌 어둠 밀어낼 수 있으므로 꽃 하나가 봄 전체는 아닐지라도 꽃 하나만큼의 봄일지라도 ​ ​ ​ ​ 류시화 시집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 ​ ​

눈풀꽃이 나에게 읽어 주는 시 / 류시화

그림 / 다비드 자맹 ​ ​ ​ 눈풀꽃이 나에게 읽어 주는 시 / 류시화 ​ ​ 너의 걸작은 너 자신 자주 무너졌으나 그 무너짐의 한가운데로부터 무너지지 않는 혼이 솟아났다 무수히 흔들렸으나 그 흔들림의 외재율에서 흔들림 없는 내재율이 생겨났다 다가감에 두려워했으나 그 두려움의 근원에서 두려움 없는 자아가 미소 지었다 너의 봄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너 자신이 봄이다 너의 걸작 ​ ​ 류시화 시집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