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 1387

설탕 / 박소란

그림 / 구자숙 설탕 / 박소란 커피 두 스푼 설탕 세 스푼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오 어쩌면 테이블 아래 새하얀 설탕을 입에 문 개미들이 총총총 기쁨에 찬 얼굴로 지나갑니다 개미는 다정한 친구입니까 애인입니까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 달콤한 입술로 내가 가본 적 없는 먼 곳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당신을 위해 오늘도 나는 단것을 주문하고 마치 단것을 좋아하는 사람처럼 웃고 재잘대고 도무지 맛을 알 수 없는 불안이 통째로 쏟아진 커피를 마시며 단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다정을 흉내 내는 말투로 한번쯤 묻고도 싶었는데 언제나처럼 입안 가득 설탕만을 털어넣습니다 그런 내게 손을 내미는 당신 당신은 다정한 사람입니까 오 제발 다정한 당신의 두 발, 무심코 어느 가녀린 생을 우지끈..

그만 내려놓으시오 / 공광규

그림 / 이율 그만 내려놓으시오 / 공광규 인생 상담을 하느라 스님과 마주 앉았는데 보이차를 따라놓고는 잔을 들고 있어 보라고 한다 작은 찻잔도 오래 들고 있으니 무겁다 그만 내려놓으시오 찻잔을 내려놓자 금세 팔이 시원해졌다 절간을 나와 화분에 담겨 시든 꽃을 매달고 있는 화초와 하수가 고여 썩은 개천을 지나오는데 꽃은 화려함을 땅에 내려놔야 열매를 얻고 물은 도랑을 버려야 강과 바다에 이른다는 말씀이 내 뒤를 따라온다 *공광규 시집 / 파주에게

잠 / 류시화

그림 / 박은영 잠 / 류시화 나를 치유해 준 것은 언제나 너였다 상처만이 장신구인 생으로부터 엉겅퀴 사랑으로부터 신이 내린 처방은 너였다 옆으로 돌아누운 너에게 눌린 내 귀, 세상의 소음을 잊고 두 개의 눈꺼풀에 입 맞춰 망각의 눈동자를 봉인하는 너, 잠이여 나는 다시 밤으로 돌아와 있다 밤에서 밤으로 부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시간으로 얼굴의 윤곽을 소멸시키는 어둠 속으로 나라고 하는 타인은 불안한 예각을 가지고 있다 잠이 얕은 혼을 내가 숨을 곳은 언제나 너였다 가장 큰 형벌은 너 없이 지새는 밤 네가 베개를 뺄 때 나는 아직도 내가 깨어 있는 이곳이 낯설다 때로는 다음 생에 눈뜨게도 하는 너, 잠이여 * 류시화 제3시집 /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병 / 공광규

그림 / 이중섭 병 / 공광규 고산지대에서 짐을 나르는 야크는 삼천 미터 이하로 내려가면 오히려 시름시름 아프다고 한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동물 주변에도 시름시름 아픈 사람들이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파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다 직장도 잘 다니고 아부도 잘하고 돈벌이도 아직 무난하다 내가 병든 것이다 공광규 시집 / 파주에게

유리의 기술 / 정병근

그림 / 김환기 유리의 기술 / 정병근 유리창에 몸 베인 햇빛이 피 한 방울 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 고통은 바람인가 소리인가 숨을 끊고도, 저리 오래 버티다니 창문을 열어 바람을 들이자 햇빛은 비로소 신음을 뱉으며 출렁인다 고통은 칼날이 지나간 다음에 찾아오는 법 회는 칼날의 맛이 아니던가 깨끗하게 베인 과일의 단면은 칼날의 기술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풍경의 살을 떠내는 저 유리의 기술, 머리를 처박으며 붕붕거리는 파리에게 유리는 불가해한 장막일 터, 훤히 보이는 저곳에 갈 수 없다니! 이쪽과 저쪽, 소리와 적막 그 사이에 통증 없는 유리의 칼날이 지나간다 문을 열지 않고도 안으로 들이는 단칼의 기술, 바람과 소리가 없다면 고통도 없을 것이다 *시집 / 번개를 치다

살아 있는 것 아프다 / 류시화

그림 / 이진화 살아 있는 것 아프다 / 류시화 밤고양이가 나를 깨웠다 가을 장맛비 속에 귀뚜라미가 운다 살아 있는 것 다 아프다 다시 잠들었는데 꿈속에서 내가 죽었다 그날 밤 별똥별 하나가 내 심장에 박혀 나는 낯선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나는 알았다 그것이 시라는 것을 뉴시화 시집 /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행복 / 유치환

그림 / 박은영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 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각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붙이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 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치매-치매행 391 / 홍해리

그림 / 이중섭 치매-치매행 391 / 홍해리 이별은 연습을 해도 여전히 아프다 장애물 경주를 하듯 아내는 치매 계단을 껑충껑충 건너뛰었다 "네가 치매를 알아?" "네 아내가, 네 남편이, 네 어머니가, 너를 몰라본다면!" 의지가 없는 낙엽처럼 조붓한 방에 홀로 누워만 있는 아내 문을 박차고 막무가내 나가려고들 때는 얼마나 막막했던가 울어서 될 일 하나 없는데 왜 날마다 속울음 울어야 하나 연습을 하는 이별도 여전히 아프다 홍해리 시집 /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