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추를 채우면서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잘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채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 문학이야기/명시 2020.04.20
꽃 피는 공중전화 꽃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 문학이야기/명시 2020.04.18
가시 가시 / 신덕룡 주먹을 쥐었다 폈다 늦도록 잠 못 이루는 밤 누가 걸어놓았나. 봄밤에 꽃물처럼 번져 가는 징소리를 듣는다. 제대로 울 때까지 두들겨 맞아 안과 밖이 맞붙은 자리, 피멍이 맺힌 자리에 고여 있던 울음이다. 고요한 눈물의 때를 기다려 들끓고 섞이고 오래도록 곰삭은 울음 .. 문학이야기/명시 2020.04.17
시냇물 (Me ruisseau) / 자크 프레베르 시냇물 (Me ruisseau) / 자크 프레베르 다리 아래로 많은 물 흘러가고 또한 엄청난 핏물도 흘렀다오 하지만 사랑의 발치에는 위대한 순결의 물결이 흐른다오 그리고 달빛 감도는 정원 그 곳에는 날마다 너의 축제여라 그 시냇물은 잠을 자면서 노래를 부른다오 그 곳에는 나의 머리여라 그 곳.. 문학이야기/명시 2020.04.16
산산조각 산산조각/ 정호승 룸비에서 사온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목은 목대로 발가락은 발가락대로 산산조각이 나 얼른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끓고 서랍속에 넣어 두었던 순간접착제를 꺼내 붙였다 그때 늘 부서지지 않으려고 .. 문학이야기/명시 2020.04.14
이상난동 이상난동 / 천양희 때도 아닌데 개나리가 피었다 철없이 웬 개, 나리가 꽃 한 번 못 피운 무화나무 우두커니 서 있어 마음이 꽃잎 몇, 피워올린다 나를 웃게 하는 건 피어나는 꽃잎들 움트는 초록들 세상에는 피우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불이나 바람 구름까지도 때도 아닌 때에 피어버.. 문학이야기/명시 2020.04.13
고흐의 달 * 고흐의 방 (수채화 처음 배울 때 그린 그림입니다) 고흐의 달 / 구석본 고흐가 귀를 버렸다. '사랑'을 말하는 속삭임이 '사랑'을 잃어버렸고 '슬픔'이라는 목소리가 '슬픔'으로 들리지 않았을 때 고흐는 귀를 잘라 허공으로 던졌다. 진실은 그늘처럼 언어(言語) 안에 있는 법. 오늘밤, 허공.. 문학이야기/명시 2020.04.12
재로 지어진 옷 재로 지어진 옷 / 나희덕 흰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제 마음 몇 배.. 문학이야기/명시 2020.04.11
누가 울고 간다 누가 울고 간다 / 문태준 잘그랑거리며 밤새 내리던 눈이 그친 고요한 아침, 문득 밀려오는 외로움에 창밖을 내다봅니다. 넝쿨 위에서 가슴 붉은 새 한 마리 웁니다. 울다 이내 떠납니다. "겨울처럼 여린" 울음의 잔상만 남겨둔 채. "누가 귀에서 그 소리를 꺼내는지" 새가 머물다 간 귓가로.. 문학이야기/명시 2020.04.07
고금도 아리랑 고금도 아리랑 / 이은숙 어디 불타는게 강물뿐이더냐 토방에 엎지러진 한 동이 화한 젖은 육신 마디마디 주술걸린 맏상주 처마 끝에 매달린 부서지는 노랫소리 동네 아낙들 웃더라 목청 실한 앞소리꾼 더 큰 소리로 웃더라 아름다운 상여머리 뒤돌아 앉은 밤 금쪽 같은 막내딸년 눈물도 .. 문학이야기/명시 2020.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