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나희덕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 있던 고향 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 문학이야기/명시 2020.02.24
강이 흐르리 강이 흐르리 기형도 이승은 언제나 쓰라린 겨울이어라 바람에 베이는 살갗 홀로 걷는 꿈이어라 다가오는 겨울에는 아름답다 그대 기다린 뜻도 우리가 전생으로 돌아가는 마음 하나로 아무도 없는 한적한 길 눈을 맞으며 걸으리니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마다 겨울이 끝나는 봄녘 햇빛이 .. 문학이야기/명시 2020.02.22
사랑 사랑 조병화 사랑은 언제나 좀 서운함이어라 내가 찾을 때 네가 없고 네가 찾을 때 내가 없음이여 후회는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 일어나는 바람이려니 그리움은 더욱 더 사라진 뒤에 오는 빈 세월이려니 사랑은 좀 더 서운함이려니 그리움은 아프게 더 더 긴 세월이려니 아,인생이 이러함.. 문학이야기/명시 2020.02.20
삶 삶 김용택 매미가 운다. 움직이면 덥다. 새벽이면 닭도 운다. 하루가 긴 날이 있고 짧은 날이 있다. 사는 것이 잠깐이다. 하는 짓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 사는 일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 상처받지 않은 슬픈 영혼들도 있다 하니, 생이 한번뿐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 숲속에 웬일이냐.. 문학이야기/명시 2020.02.20
능소화의 연가 능소화의 연가 류인순 단 한 번 맺은 사랑 천 년의 기다림 되어 오늘도 행여 임 오실까 임 지나는 담장 가에 주렁주렁 꽃등 내걸고 깨금발로 서성이며 애간장 타는 설움 온몸 출렁대는 그리움에 목은 자꾸자꾸 길어지고 임 향한 마음 불타오르다 속절없이 붉은 눈물 뚝뚝 떨구는 왕의 꽃 .. 문학이야기/명시 2020.02.19
쑥부쟁이 쑥부쟁이 박해옥 저녁놀 비끼는 가을언덕에 새하얀 앞치마 정갈히 차려입은 꼬맹이 새댁 살포시 웃음 띤듯하지만 꽃빛을 보면 알아 울음을 깨물고 있는 게야 두 귀를 둥글게 열어 들어보니 내 고향 억양이네 정성스레 냄새를 맡아보니 무명적삼서 배어나던 울엄니 땀내 울먹대는 사연을.. 문학이야기/명시 2020.02.17
붕어빵을 굽는 동네 붕어빵을 굽는 동네 이화은 달아오른 철판 위에서 붕어들이 몸부림칠 때쯤 귀가길의 남편들 산란의 따끈한 꿈을 한 봉투 가슴에 품어 안는다 아파트 창의 충혈된 불빛이 물풀로 일렁이고 아내들의 둥근 어항 속으로 세차게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밤의 한가운데를 직진하는 숨소리 파도.. 문학이야기/명시 2020.02.17
빈 화분에 물주기 빈 화분에 물주기 이근화 어디에서 날아온 씨앗일까 누가 파 온 흙일까 마시던 물을 일없이 빈 화분에 쏟아부었더니 며칠 지나 잎이 나온다 욕 같다 너 내게 물 먹였지 그러는 것 같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그러면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볕이 잘드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몰라.. 문학이야기/명시 2020.02.17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이 외 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부는 날에는 바람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 꽃피는 날이 있다면 어찌 꽃지는 날이 없으랴 온 세상을 뒤집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밤에도 소망은 하늘로 가지를 뻗어 달빛을 건지.. 문학이야기/명시 2020.02.17
어린것 어린것 나희덕 어디서 나왔을까 깊은 산길 갓 태어난 듯한 다람쥐새끼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 맑은 눈빛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어린것들은 내 앞에 눈부신 꼬리를 쳐들고 나를 어미라 부른다 괜히 가슴이 젓릿저릿한 게 핑그르르 굳었던 젖이 돈.. 문학이야기/명시 2020.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