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그대여 / 안재식 그림 / 최원우 지친 그대여 / 안재식 노을마저 숨어버린 북악산에 그래도 아우성치는 풀꽃을 보시라, 둘러보면 서럽지 않은 사랑 어디 있으랴 억울하지 않은 이 뉘 있으랴 삶이란, 왕복표 없는 단 한 번뿐인 낯선 길 설레는 여행이기에 세상은 살 만한 것이거늘 칠흑의 정원에서도 꽃눈 틔우려 아우성치는 저, 성스러운 소리 그 끈기를 들어보시라 *한국문인협회 편집위원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동인 *중랑문학대학 출강 문학이야기/명시 2023.01.02
우주의 그릇 / 이근배 그림 / 심재관 우주의 그릇 / 이근배 하늘이 이보다 높으랴 바다가 이보다 넓으랴 조선 백자 항아리 흰 옷의 백성들 희고 깨끗한 마음 담아 우주의 그릇을 지었구나 어느 천상의 궁궐이 어느 심해의 용궁이 이렇듯 웅대장엄하랴 꺼지지 않는 백의의 혼불이 해와 달보다 더 밝구나 오랜 이 땅의 역사 여기 불멸의 탑으로 서 있나니 우주 안에 또 하나의 우주이어라 2023년 1월 신문예 초대시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역임 *경향, 서울, 조선, 동아, 한국일보 신춘문예 5관왕 *시집 외 전지연 작품 문학이야기/명시 2023.01.01
겨울 자연 / 이근배 그림 / 소순희 겨울 자연 / 이근배 나의 자정에도 너는 깨어서 운다 산은 이제 들처럼 낮아지고 들은 끝없는 눈발 속을 헤맨다 나의 풀과 나무는 어디 갔느냐 해체되지 않은 영원 떠다니는 꿈은 어디에 살아서 나의 자정을 부르느냐 따순 피로 돌던 사랑 하나가 광막한 자연이 되기까지는 자연이 되어 나를 부르기까지는 너의 무광의 죽음 구름이거나 그 이전의 쓸쓸한 유폐 허나 세상을 깨우고 있는 꿈속에서도 들리는 저 소리는 산이 산이 아닌, 들이 들이 아닌 모두가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쁨 같은 울음이 달려드는 것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역임 *경향, 서울, 조선, 동아, 한국일보 신춘문예 5관왕 *시집 외 문학이야기/명시 2022.12.31
울음이 타는 가을江 / 박재삼 그림 / 후후 울음이 타는 가을江 /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에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江을 보것네. 저것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江을 처음 보것네. 시집 / 시가 내게로 왔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12.28
바늘귀 / 이 효 그림 / 문미란 바늘귀 / 이 효 이불 꿰매는 엄마 바늘귀에 실은 혀끝을 더듬는다 엿가락 뽑듯 길게 당긴 늘어진 오후 요년, 시집 멀리 갈래 엄마, 실을 길게 꿰면 새들이 수평선 넘어가 싫어, 소라와 게처럼 살래 대답은 빨랫줄에서 웃는다 햇살이 싹둑 잘린 오후 줄에 풀 먹인 유년이 펄럭인다 짧은 눈썹 같은 대답이 유순해진다 그녀는 구름 위에 신방을 꾸민다 그날 이후 딸년의 낭창거리는 목소리 들리지 않는다 이효 시집 / 당신의 숨 한 번 문학이야기/명시 2022.12.11
계산동 성당 / 황유원 그림 / 장정화 계산동 성당 / 황유원 요즘엔 침묵만 기르다 보니 걸음까지 무거워졌지 뭡니까 한 걸음 한 걸음 지날 때마다 거기 벽돌이 놓여 뭐가 지어지고 있긴 한데 돌아보면 그게 다 침묵인지라 아무 대답도 듣진 못하겠지요 계산 성당이 따뜻해 보인다곤 해도 들어가 기도하다 잠들면 추워서 금방 깨게 되지 않던가요 단풍 예쁘게 든 색이라지만 손으로 만져도 바스라지진 않더군요 여린 기도로 벽돌을 깨뜨릴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옛 사제관 모형은 문이 죄다 굳게 닫혀 있고 모형 사제관 안에 들어가 문 다 닫아버리고 닫는 김에 말문까지 닫아버리고 이제 그만 침묵이나 됐음 하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의 무게는 차라리 모르시는 게 낫겠지요 너무 새겨듣진 마세요 요즘엔 침묵만 기르다 보니 다들 입만 열면 헛소리라 하더군.. 문학이야기/명시 2022.12.09
늙어가는 첫사랑 애인에게 / 최금진 그림 / 한영숙 늙어가는 첫사랑 애인에게 / 최금진 주인 없는 황량한 뜰에서 아그배나무 열매들은 저절로 떨어지고 내가 만든 편견이 각질처럼 딱딱하게 손끝에서 만져질 때 아침엔 두통이 있고, 점심땐 비가 내리고 밤새 달무리 속을 걸아가 큰 눈을 가진 개처럼 너의 불 꺼진 창문을 지키던 나는 이제 없다 그때 너와 맞바꾼 하나님은 내 말구유 같은 집에는 다신 들르시질 않겠지 나는 어머니보다 더 빨리 늙어가고 아무리 따라하려 해도 안되는 행복한 흉내를 거울은 조용히 밀어낸다 혼자 베란다에 설 때가 많고, 너도 남편 몰래 담배나 배우고 있으면 좋겠다 냄새나는 가랑이를 벌리고 밑을 씻으며 습관적으로 욕을 팝콘처럼 씹어 먹고 아이의 숙제를 끙끙대며 어느 것이 정답인지 도대체 모르겠다고 너무 많은 정답과 오답을 가진 .. 문학이야기/명시 2022.12.07
부치지 않은 편지2 / 정호승 그림 / 김진구 부치지 않은 편지2 / 정호승 풀잎은 쓰러져도 하늘을 보고 꽃피기는 쉬워도 아름답긴 어려워라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사람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 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가라 그대 눈물 이제 곧 강물되리니 그대 사랑 이제 곧 노래되리니 산을 입에 물고 나는 눈물의 작은 새여 뒤돌아 보지 말고 그대 잘가라 * 정호승 /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12.06
조퇴 / 강희정 그림 / 안려원 조퇴 /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믄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시간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걸어간다 문학이야기/명시 2022.12.05
부치지 않은 편지1 / 정호승 그림 / 성기혁 부치지 않은 편지1 / 정호승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이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 이슬에 새벽 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 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정호승시집 / 새벽편지 문학이야기/명시 2022.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