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7

멜로 영화 / 이진우

그림 / 조규일 멜로 영화 / 이진우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

목계장터 / 신경림

그림 / 이미화 ​ ​ ​ 목계장터 / 신경림 ​ ​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울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라 짠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 ​ *충북 충주 부근 남한강변 어디쯤 목계나루란 나루가 있고 거기에 "목계장터"란 시비가 있다고 들었다. 그 고장이 고향인 신경림 ..

뒷모습 / 정호승

그림 / 소순희 ​ ​ ​ 뒷모습 / 정호승 ​ ​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다고 이제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졌으리라 뒤돌아보았으나 내 뒷모습은 이미 벽이 되어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높은 시멘트 담벼락 금이 가고 구멍이 나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제주 푸른 바닷가 돌담이나 예천 금당실마을 고샅길 돌담은 되지 못하고 개나 사람이나 오줌을 누고 가는 으슥한 골목길 담쟁이조차 자라다 죽은 낙서투성이 담벼락 폭우에 와르르 무너진다 순간 누군가 담벼락에 그려놓은 작은 새 한마리 포르르 날개를 펼치고 골목 끝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내 뒷모습에 가끔 새가 날아왔다고 맑은 새똥을 누고 갈 때가 있었다고 내 뒷모습이 아름다울 때도 있었다고 ​ ​ ​ ​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 ​ ​​ ​ ​

​허공을 적시는 분홍 / 이현경

그림 / 한회숙 ​ ​ 허공을 적시는 분홍 / 이현경 ​ ​ 빈 가지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 꽃 피는 속도로 우리들의 눈을 끌어모으고 있다 ​ 허공을 적시는 분홍 꽃잎이 수면에 접사되어 호수 둘레에 웃음이 떠 있다 ​ 벚꽃 무리를 어루만지는 바람의 손 ​ 화심이 머문 곳에 갓 나온 향기가 나비를 두근거리게 한다 ​ 바람을 열고 수만 개의 이야기로 부푸는 벚꽃을 무수히 읽고 있으면 ​ 저 공중에 어린 체온이 두근두근 마음을 휘감는다 ​ ​ ​이현경 시집 / 맑게 피어난 사색 ​ ​ ​ ​ ​ ​

파리의 네루다를 뒤덮는 백설 송가

그림 / 박삼덕 ​ ​ ​ 파리의 네루다를 뒤덮는 백설 송가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 中에서) ​ ​ 은은하게 걷는 부드러운 동반자, 하늘의 풍요로운 우유, 티 하나 없는 우리 학교 앞치마, 호주머니에 사진 한 장 구겨 넣고 이 여관 저 여관 헤매는 말 없는 여행자의 침대 시트. 하늘거리는 귀공녀들, 수천 마리 비둘기 날개, 미지의 이별을 머금은 손수건. 나의 창백한 미인이여, 파리의 네루다 님에게 푸근하게 내려다오. 네 하얀, 제독의 옷으로 그를 치장해 다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그를 사무쳐 그리는 이 항구까지 네 사뿐한 순양함에 태워 모셔와 다오. ​ ​ ​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中에서)

그림 / 서명덕 ​ ​ ​ ​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中에서) ​ ​ '벌거벗은' 당신은 그대 손만큼이나 단아합니다. 보드랍고 대지 같고 자그마하고 동그랗고 투명하고 당신은 초승달이요 사과나무 길입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밀 이삭처럼 가냘픕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쿠바의 저녁처럼 푸릅니다. 당신 머리결에는 메꽃과 별이 빛납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거대하고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여름날의 황금 성전처럼. ​ ​ ​​ ​

2023강원일보 신춘문예

그림 / 강선아 귤이 웃는다 / 백숙현 인도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담배를 돌렸다 담배에서 녹차 맛이 났다 가볍고 부드러운 음악이 흘렀다 연기처럼 가벼워지고 싶었다 외투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스카프를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킥킥대며 웃어댔다 그들을 향해 탁자에 있던 귤을 던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머리에 명중하자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벽이 눈물을 흘렸다 깨진 귤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창문은 창문 탁자는 탁자 술잔은 술잔 귤은 귤 그러므로 나는 나 브래지어를 벗어 던졌다 도마와 밥솥을 집어 던졌다 저울과 모래시계와 금이 간 거울 때 묻은 경전과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던졌다 담배 한 개비 다 타들어 가도록 나는 던져버릴 게 너무 많았다 *가브리엘 가르세아 마르케스의 소설 심..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그림 / 장소영 2023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책을 끓이다 / 장현숙 ​ 책은 책마다 맛이 다르다 ​ 초록 표지의 책에선 식물의 맛이 나고 지구에 관한 책에선 보글보글 빗방울 소리가 나고 어류에 관한 책에선 몇천 년 이어온 강물 소리가 난다 곤충에 관한 책에선 더듬이 맛이 나, 이내 물리지만 남쪽 책장은 마치 텃밭 같아서 수시로 펼쳐볼 때마다 넝쿨이 새어 나온다 오래된 책일수록 온갖 눈빛의 물때와 검정이 반들반들 묻어있다 두꺼운 책을 엄지로 훑으면 압력밥솥 추가 팔랑팔랑 돌아간다 침실 옆 책꽂이 세 번째 칸에는 읽고 또 읽어도 설레는 연애가 꽂혀 있다 쉼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누군가와 겹쳐진다 그러면 따옴표가 보이는 감정을 챙겨 비스듬히 행간을 열어놓는다 새벽까지 읽던 책은 바짝 졸아서 타는 냄새가 ..

눈부신 햇살 / 나호열

그림 / 박삼덕 눈부신 햇살 / 나호열 아침에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하다 눈뜨면 가장 먼저 달려오는 해맑은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행복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아무도 가지 않은 새벽길을 걸어가며 꽃송이로 떨어지는 햇살을 가슴에 담는 일이 행복이다 가슴에 담긴 것들 모두 주고도 더 주지 못해 마음 아팠던 사랑을 기억하는 일이 행복이다 나호열 시집 / 바람과 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