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8

물의 온도 / 장혜령

그림 / 이율 물의 온도 / 장혜령 바람이 지난 후의 겨울 숲은 고요하다 수의를 입은 눈보라 물가에는 종료나무 어두운 잎사귀들 가지마다 죽음이 손금처럼 얽혀 있는 한 사랑이 지나간 다음의 세계처럼 이 고요 속에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초록이 초록을 풍경이 색채를 간밤 온 비로 얼음이 물소리를 오래 앓고 빛 드는 쪽으로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 이른 아침 맑아진 이마를 짚어보고 떠나는 한 사람 종소리처럼 빛이 번져가고 본 적 없는 이를 사랑하듯이 깨어나 물은 흐르기 시작한다 장혜령 시집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장혜령 시집)

나무 생각 / 안도현

그림 / 김순영 나무 생각 / 안도현 나보다 오래 살아온 느티나무 아래서는 무조건 무릎 끓고 한 수 배우고 싶다 복숭아나무가 복사꽃 흩뿌리며 물 위에 점점이 우표를 붙이는 날은 나도 양면괘지에다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에 기를 쓰고 붙어 있는, 허리 뒤틀린 조선소나무를 보면 애국가를 4절까지 불러주고 싶다 자기 자신의 욕망을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멀리 보내는 밤나무 아래에서는 아무 일 아닌 것같이 나도 관계를 맺고 싶다 나 외로운 날은 외변산 호랑가시나무 숲에 들어 호랑가시나무한테 내 등 좀 긁어달라고, 엎드려 상처받고 싶다 안도현 시집 /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황태마을 덕장에서 / 권수진

그림 / 송지윤 황태마을 덕장에서 / 권수진 눈 덮인 진부령 고갯길 너머 용대리 황태마을 덕장 안 명태들이 피아노 건반처럼 매달려 있다 시베리아 북서풍에 맞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아가리 크게 벌려 목청을 가다듬는 명태 두름 매서운 바람이 누르는 건반 소리에 박자를 맞춰 허공을 향해 일제히 트위스트 춤을 춘다 추위를 즐기는 명태들의 모습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등록금 천만 원 시대를 살아가는 힘겨운 세상 밤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우리들에게 따뜻한 해장국 한 그릇이 되고 싶었다던 아버지 우리는 그의 몸뚱이를 발기발기 찢어서 뜨거운 김 모락모락 피어나는 국물을 훌훌 마시며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덕장 건조대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런 빛깔로 맛깔스레 익어가는 아버지가 걸려 있다..

11월의 노래 / 김용택

그림 / 조은희 11월의 노래 / 김용택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납니다 ​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와 닿습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김용택 시집 / 그대, 거침없는 사랑

하모니카 부는 오빠 / 문정

그림 / 정전옥 하모니카 부는 오빠 / 문정 오빠의 자취방 앞에는 내 앞가슴처럼 부풀어 오른 사철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아래에는 평상이 있고 평상 위에서는 오빠가 가끔 혼자 하모니카를 불죠 나는 비행기의 창문들을 생각하죠, 하모니카의 구멍들마다에는 설레는 숨결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이륙하듯 검붉은 입술로 오빠가 하모니카를 불면 내 심장은 빠개질 듯 붉어지죠 그때마다 나는 캄보디아를 생각하죠 양은 밥그릇처럼 쪼그라들었다 죽 펴지는 듯한 캄보디아 지도를 생각하죠, 멀어서 작고 붉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오빠는 하모니카를 불다가 난기류에 발목 잡힌 비행기처럼 덜컹거리는 발음으로 말해주었지요, 태어난 고향에 대해, 그곳 야자수 잎사귀에 쌓이는 기다란 달빛에 대해, 스퉁트랭, 캄퐁참, 콩퐁솜 등 울퉁불퉁 돋아..

매듭 / 장흥진

그림 / 정미경 매듭 / 장흥진 택배로 온 상자의 매듭이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방식으로 단단히 묶인 끈 보다못한 아이가 칼을 건넨다 늘 지름길을 지향하는 칼 좌석표가 있다는데 일부러 입석표를 끊어 두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를 서서 가시며 그 근소한 차액을 남기시던 어머니는 평생 지름길을 모르는 분이었다 상자속엔 가을걷이한 곡식과 채소가 들어있을 것이다 꾹꾹 눌러도 넘치기만 할 뿐 말끔히 닫히지 않는 상자를 가로 세로 수십 번 이 비닐끈으로 동여 매셨을 어머니의 뭉툭한 손마디가 떠올라 칼을 가만히 내려 놓는다 힘이 들수록 오래 기도하시던 어머니처럼 무릎을 꿇고 밤이 이슥해지도록 상자의 매듭과 대결한다 이는 어쩌면 굽이진 어머니의 길로 들어가 아득히 가시는 어머니를 따라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린 날에는 이..

7월의 종교 / 정와연

그림 / 김소영 7월의 종교 / 정와연 ​ 칠월, 콩밭에 무릎을 꿇고 어머닌 기도중이다 늙어 쭈그려 앉기 힘든 무릎 그 무릎을 꿇고 콩밭을 맨다 넓고 긴 고랑은 한여름 고난의 십자가 푸른 강대상 앞에 땀을 뚝뚝 흘리는 기도다 잡초를 매고 북을 돋우고 순을 자르며 온몸으로 흘리는 기도 밭고랑은 어머니의 종교다 무릎을 혹사당한 예배다 꿈속에서 종소리를 들었는지 새벽잠 깨워 나서는 어머니의 예배당 개척교회 목사님이 심방을 오시는지 무릎 꿇고 엎드려 하루 종일 청소중이다 뿌리가 박테리아와 어머니의 기도가 공생하는지 어머니의 기도를 빨아들이고 남은 기도를 저장한 뿌리혹주머니가 우툴두툴하다 칸칸이 맺힌 잘 여문 콩알들은 어머니 땀방울이고 무릎 닳은 기도의 응답이다 그래서 몇 년 묵은 장맛은 헌신한 무릎의 맛이 난다..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정경이

그림 / 정진경 신춘당선작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 / 정경이 우항리에서 그곳에 가면 싱싱한 그리움의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발자국을 신어 볼 수 있다 따뜻한 햇살이 발등을 콕콕 쪼는 해변을 따라 달려 가다 보면 손톱만한 꽃들이 까르르르 하얀 웃음 흩뿌리고 갈대들이 뒷걸음질치며 다정하게 손 흔드는 호숫가, 생기 넘치는 풍경 들은 여러 장의 궁금증을 복사한다 궁금증을 살짝 들추면 잔물결이 발을 간지럽히는데도 웃음을 참고 발자국 걸어나온다 그런데 누가 저렇게 헐렁한 신발을 신고 다녔을까 바위에 박힌 발자국은 서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촘촘히 껴안고 있다 1억년이 넘도록 흐트러 지지 않은 발자국의 깊이만큼 두꺼운 사랑, 껴안고 돌이 된 채로 백열등 만한 심장을 찾아 환하게 불 밝히고 있을 심장을 찾아 헤맸는지도..

새에게 묻다 / 정호승

그림 / 남복현 새에게 묻다 / 정호승 사람들이 자꾸 나를 바보라고 한다 나는 내가 정말 바보인지 너무 궁금해서 우리집 아파트 베란다 헌식대에 모이를 주다가 어린 새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정말 바보냐고 새가 물 한모금 입에 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바보라고 나는 비로서 내가 바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새들과 함께 맛있게 모이를 쪼아 먹기 시작했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하나'를 음미하다 / 유안진

그림 / 김상덕 '하나'를 음미하다 / 유안진 올리버 크롬웰은 한 표 차이로 영국의 통치권을 장악했고(1645) 영국 왕 찰스 1세는 한 표 차이로 처형당했고(1649) 한 표 차이로 미국의 헌법 조문의 국어는 독일어 아닌 영어로 결정되어(1776), 오늘에 이르렀고 프랑스는 한 표 차이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고(1875) 아돌프 히틀러는 한 표 차이로 나치당을 장악했다지(1923) 명함 대한민국(大韓民國) 김관식(金冠植) 시인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딱 한 표를 얻었는데, 어떻게 자기 남편을 안 찍을 수 있느냐는 시인에게, 부인 방 여사는 "아무나 국회의원 되면 나라 꼴이 어찌 되겠나? 싶어서"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남겼지(1960) "미스 유, 여기 앉아요" 자기 자리를 내준 그 말 한마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