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오늘의 의상 / 정지우<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그림 / 조연수 오늘의 의상 / 정지우 ​​ 성당의 느티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끌리고 있다 팔랑거리는 양떼들을 데리고 계절 속으로 입성하려면 가벼운 체위는 가리고 고딕의 시대를 지나야 한다 폭염은 언덕에 한낮으로 누워 있다 구름의 미사포를 쓰고 그늘을 숙이던 오후는 초록의 전례를 들려주더니 밀빵을 혀에 얹고 한동안 입들이 닫혀 있을 것이다 종탑에는 귀머거리 새가 종소리를 둥지로 삼아 살고 있다 회색을 입고 묵상에 잠긴 성전엔 돌기둥을 돌던 저녁의 의복이 걸쳐져 있다 미사의 요일엔 검은 머리카락을 버리고 히브리어를 닮은 숟가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디저트가 없는 주일 맛 나는 테이블 중세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창문 귀가 잘려진 무늬에선 단풍잎 맛이 나는 오래된 말들이 달그락거린다..

모닥불 / 정호승

그림 / 심승보 모닥불 / 정호승 강가의 모닥불 위에 함박눈이 내린다 하늘의 함박눈이 모닥불 위에 내린다 모닥불은 함박눈을 태우지 않고 스스로 꺼진다 함박눈은 모닥불에 녹지 않고 스스로 녹는다 나는 떠날 시간이 되어 스스로 떠난다 시간도 인간의 모든 시간을 스스로 멈춘다 이제 오는 자는 오는 곳이 없고 가는 자는 가는 곳이 없다 인생은 사랑하기에는 너무 짧고 증오하기에는 너무 길다 정호승 시집 / 슬픔이 택배로 왔다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 유병록 (천상병 시 문학상 23회)

그림 / 강애란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 유병록 ​ 우리 이번 봄에는 비장해지지 않기로 해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 아무 다짐도 하지 말아요 서랍을 열면 거기 얼마나 많은 다짐이 들어 있겠어요 ​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해요 앞날에 대해 침묵해요 작은 약속도 하지 말아요 ​ 겨울이 와도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는지 돌아보지 않기로 해요 봄을 반성하지 않기로 해요 ​ 봄이에요 내가 그저 당신을 바라보는 봄 금방 흘러가고 말 봄 ​ 당신이 그저 나를 바라보는 봄 짧디짧은 봄 ​ 우리 그저 바라보기로 해요 ​ 그뿐이라면 이번 봄도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유병록 시집 / 아무 다짐 않기로 해요 .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 이기리

그림 / 안려원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 이기리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 어느 날 친구는 내 손목을 잡더니 내가 네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아? 커터 칼을 검지 마디에 대고 책상에 바짝 붙였다 친구는 나의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다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다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뒤로 다가가 포옹을 하는 뒷모습으로 옷깃을 풀고 가슴 속으로 뜨거운 우유를 부었다 칠판에 떠든 친구들을 적었다 너, 너, 너 야유가 쏟아졌다 지우개에 맞았다 불 꺼진 화장실에서 오줌을 쌀 때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손아귀가 커졌고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검지가 이마를 툭툭 종례 시간이 끝나도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메기 / 신동호

그림 / 장현우 메기 / 신동호 파로호의 메기는 물안개를 먹고산다 안개는 추문을 감추지만, 흐릿하게, 아주 잊히지 않을 만큼만, 아는 사람들만 알 정도로만 사랑을 드러낸다. 깊은 자맥질. 강을 흘린 메기의 흔적만 쫓을 뿐, 미끄덩, 손에서 빠져나간 기억들을 주워담기에 우리들 마음이 너무 가난하다. 주낙을 기다리고 물안개를 기다렸다. 강물이 안개와 뒤섞여 낡은 거룻배의 바닥에서 찰랑댈 때 저녁의 메기들이 옛일을 떠올렸다. 안개를 좋아했던 작은 형의 두툼한 손이 지금도 뒤춤을 잡곤 한다. 파라호에서는 메기가 우리를 선택했다. 번번이 빈 주낙 때문에 낙담할 것 없다. 신동호 시집 / 그림자를 가지러 가야 한다

자화상 / 서정주

그림 / 박송연 자화상 /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믈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

단풍나무 / 안도현

그림 / 김연화 단풍나무 / 안도현 둘러봐도, 팔장 끼고 세상은 끄떡없는데 나 혼자 왜 이렇게 이마가 뜨거워지는가 나는 왜 안절부절 못하고 서서 마치 몸살 끝에 돋는 寒氣처럼 서서 어쩌자고 빨갛게 달아오르는가 너 앞에서, 나는 타오르고 싶은가 너를 닮고 싶다고 고백하다가 확, 불이 붙어 불기동이 되고 싶은가 가을날 후미진 골짜기마다 살 타는 냄새 맑게 풀어놓고 서러운 뼈만 남고 싶은가 너 앞에서는 왜 순정파가 되지 못하여 안달복달인가 나는 왜 세상에 갇혀 자책의 눈물 뒤집어쓰고 있는가 너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왜 네가 되고 싶은가 그리운 여우 / 안도현 시집

그림자 물풀 / 강은교

그림 / 신종식 그림자 물풀 / 강은교 눈물을 등불처럼 창밖에 걸어놓은 날 아주 긴 바람 소리 너를 찾아서 헤매고 있었어, 냉장고를 열어보고, 그릇 사이를 들여다보고, 벽 틈을 헤쳤지만 지나가는 구름까지도 들춰 보았지만, 너는 없었어, 그때 나는 보았어, 무엇인가가 문을 나서는 것을, 바로 너 였어, 지느러미를 훨훨 날리며, 문밖으로 유유히 나가는 것을, 없는 파도 속으로 깊이 깊이 몸을 감추는 것을, 물풀이 허리를 흔들며 너를 맞고 있었어, 퉁퉁 불은 너의 몸을, 열에 뜬 너의 몸을, 아, 글쎄 물풀이 그림자 물풀이, 강은교 시집 /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별똥별 / 정호승

그림 / 안려원 별똥별 / 정호승 나는 견인되었다 지구 밖으로 다른 사람보다 너무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돈도 못 벌면서 밥을 많이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화장실에 가서 남보다 똥을 많이 누었다는 이유만으로 지구 밖으로 견인되어 별똥별이 되었다 슬픔이 택배로 왔다 / 정호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