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966

물 위에 쓴 시 / 정호승

그림 / 황 순 규 ​ ​ ​ 물 위에 쓴 시 / 정호승​ ​ ​내 천 개의 손 중 단 하나의 손만이 그대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내 천 개의 눈 중 단 하나의 눈만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리다가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하여 길이 없는 밤은 너무 깊어 달빛이 시퍼렇게 칼을 갈아 가지고 달려와 날카롭게 내 심장을 찔러 이제는 내 천 개의 손이 그대의 눈물을 닦아줍니다 내 천개의 눈이 그대를 위해 눈물을 흘립니다. ​ ​​ ​ 정호승 시선집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 ​ ​

눈물이 시킨 일 / 나호열

그림 / 장주원 ​ ​ ​ 눈물이 시킨 일 / 나호열 ​ ​ 한 구절씩 읽어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 만 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꺼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 ​ ​ 나호열 시집 / 바람과 놀다 ​ ​ ​ ​ ​

봄비는 가슴에 내리고 / 목필균

그림 / 이영학 ​ ​ ​ ​ 봄비는 가슴에 내리고 / 목필균​ ​ ​ 그대가 보낸 편지로 겨우내 마른 가슴이 젖어든다 ​ 봉긋이 피어오른 꽃눈 속에 눈물이 스며들어, 아픈 사랑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리라 ​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은 겨울 일기장 덮으며 흥건하게 적신 목련나무 환하게 꽃등 켜라고 온종일 봄비가 내린다 ​ ​ ​ 詩 전문 ​ ​ ​

​번역자 / 장혜령

그림 / 조대현 ​ ​ ​ ​ 번역자 / 장혜령​ ​ ​ ​ 이 숲에는 먼 나무가 있다 흑송이 있고 물푸레나무가 있다 ​ 가시 사이로 새어드는 저녁 빛이 있고 그 빛에 잘 닦인 잎사귀가 있다 ​ 온종일 빛이 닿은 적 없는 내부에 단 한 순간 붉게 젖어드는 것이 슬픔처럼 가만히 스며드는 것이 있다 ​ 저녁의 빛은 숲 그늘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었다 ​ 그 속에 새 그림자 하나 ​ 날개짓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 비릿한 풀냄새가 난다 불타버린 누군가의 혼처럼 ​ 이 시각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이곳을 스쳐지나가고 있다 ​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 꿈속에서 물위에서 나를 적는 사람 ​ 흔들리면서 내게 자꾸 편지를 보내는 사람 ​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다 ​ ​ ​ ​ 장혜령 시집 ..

운주사 / 함민복

그림 / 신종식 ​ ​ 운주사 / 함민복​ ​ ​ 비 내려 와불의 눈에 빗물 고인다 내 아픔이 아닌 세상의 아픔에 젖을 수 있어 내리는 비도 눈물이구나 그렇게, 다 그렇게 되어 세상에 눈물의 강 흐르면 그 위를 마음 배들 구름처럼 평화롭게 떠갈 수 있다는 설법인가 북두칠성 낮게 끌어내린 뜻도 알 듯한 ​ ​ ​ 함민복 시집 / 꽃봇대 ​ ​ ​

2023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림 / 후후 ​ ​ 버터 / 박선민 추우면 뭉쳐집니다 펭귄일까요? 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 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 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 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 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 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 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 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 초록색은 버터일까요? 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 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 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 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 당나귀일까요? 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 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 노새는 두 마리입니다..

물의 언어 / 장혜령

그림 / 박정심 ​ ​ ​ 물의 언어 / 장혜령 ​ ​ 바람이 지난 후의 겨울 숲은 고요하다 ​ 수의를 입은 눈보라 ​ 물가에는 종료나무 어두운 잎사귀들 ​ 가지마다 죽음이 손금처럼 얽혀 있는 ​ 한 사랑이 지나간 다음의 세계처럼 ​ 이 고요 속에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 초록이 초록을 ​ 풍경이 색채를 ​ 간밤 온 비로 얼음이 물소리를 오래 앓고 ​ 빛 드는 쪽으로 엎드려 잠들어 있을 때 ​ 이른 아침 맑아진 이마를 짚어보고 떠나는 한 사람 ​ 종소리처럼 빛이 번져가고 ​ 본 적 없는 이를 사랑하듯이 ​ 깨어나 물은 흐르기 시작한다 ​ ​ ​ 장혜령 시집 / 발이 없는 나의 여인은 노래한다 ​ ​ ​​ ​

멜로 영화 / 이진우

그림 / 조규일 멜로 영화 / 이진우 서른다섯 번을 울었던 남자가 다시 울기 시작했을 때 문득 궁금해집니다 사람이 슬퍼지려면 얼마나 많은 복선이 필요한지 관계에도 인과관계가 필요할까요 어쩐지 불길했던 장면들을 세어보는데 처음엔 한 개였다가 다음엔 스물한 개였다가 그다음엔 일 초에 스물네 개였다가 나중엔 한 개도 없다가 셀 때마다 달라지는 숫자들이 지겨워진 나는 불이 켜지기도 전에 서둘러 남자의 슬픔을 포기해버립니다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니까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니까 이 사이에 낀 팝콘이 죄책감처럼 눅눅합니다 극장을 빠져나와 남은 팝콘을 쏟아 버리는데 이런 영화는 너무 뻔하다고 안 봐도 다 아는 이야기라고 누군가 중얼거립니다 이런 얘기들은 등뒤에서 들려오곤 하죠 이런 이야기들의 배후엔 본 적도 없는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