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1/10 32

국화 차를 달이며 / 문 성 해

그림 / 국중길 ​ ​ ​ ​ ​ 국화 차를 달이며 / 문 성 해 ​ ​ ​ 국화 우러난 물을 마시고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나는 앞으로도 도저히 이런 맛과 향기의 꽃처럼은 아니 될 것 같고 또 동구 밖 젖어드는 어둠 향해 저리 컴컴히 짖는 개도 아니 될 것 같고 ​ 나는 그저 꽃잎이 물에 불어서 우러난 해를 마시고 새를 마시고 나비를 모시는 사람이니 ​ 긴 장마 속에 국화가 흘리는 빗물을 다 받아 모시는 땅처럼 저녁 기도를 위해 가는 향을 피우는 사제처럼 텅텅 울리는 긴 복도처럼 고요하고도 깊은 가슴이니 ​ ​ ​ ​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매일 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 ​ ​ ​

대결 / 이 상 국

그림 / 김 정 수 ​ ​ ​ ​ 대결 / 이 상 국 ​ ​ ​ ​ 큰 눈 온 날 아침 부러져나간 소나무를 보면 눈부시다 ​ 그들은 밤새 뭔가와 맞서다가 무참하게 꺾였거나 누군가에게 자신을 바치기 위하여 공손하게 몸을 내맡겼던 게 아닐까 ​ 조금씩 조금씩 쌓이는 눈의 무게를 받으며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저 빛나는 자해(自害) 혹은 아름다운 마감 ​ 나는 때때로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다 ​ ​ 이상국 시집 / 국수가 먹고 싶다 ​ ​ ​

무령왕비의 은팔찌 < 다리多利의 말> / 문 효 치

​ 그림 / 이 보 석 ​ ​ 무령왕비의 은팔찌 / 문 효 치 ​ ​ 왕비여 여인이여 내가 그대를 사모하건만 그대는 너무 멀리 계십니다 ​ 같은 이승이라지만 우리 사이에는 까마득히 넓은 강이 흐릅니다 ​ 그대를 향하여 사위어가는 정한 목숨 내가 만드는 것은 한낱 팔찌가 아니라 그대에게 달려가는 내 그리움의 몸부림입니다 ​ 내가 빚은 것은 한낱 용의 형상이 아니라 그대에게 건너가려는 내 사랑의 용틀임입니다 ​ 비늘 하나를 새겨 넣고 먼 산 보며 한숨 집니다 ​ 다시 발톱 하나 새겨 넣고 달을 보며 피울음 웁니다 내 살을 깎아 용의 살을 붙이고 내 뼈를 빼어내어 용의 뼈를 맞춥니다 ​ 왕비여, 여인이여. 그대에게 날려 보내는 용은 작은 손목에 머무르지 않고 그대 몸뚱이에 휘감길 것이며 마..

찬란 / 이병률

그림 / 임 정 순 ​ ​ ​ 찬란 / 이병률 ​ ​ ​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하다 ​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 ​ ​ ​ ​ 시집 /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을 사랑 / 도 종 환

그림 / 김 정 수 ​ ​ ​ 가을 사랑 / 도 종 환 ​ ​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는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 ​ 도종환 시집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 ​

바구미를 죽이는 밤 / 문성해

그림 / 문 경 조 ​ ​ ​ ​ 바구미를 죽이는 밤 / 문성해 ​ ​ ​ 처음엔 작은 활자들이 기어 나오는 줄 알았다 신문지에 검은 쌀을 붓고 바구미를 눌러 죽이는 밤 턱이 갈라진 바구미들을 처음에는 서캐를 눌러 죽이듯 손톱으로 눌러 죽이다가 휴지로 감아 죽이다가 마침내 럭셔리하게 자루 달린 국자로 때려 죽인다 죽음의 방식을 바꾸자 기세 좋던 놈들이 주춤주춤, 죽은척 나자빠져 있다가 잽싸게 도망치는 놈도 있다 놈들에게도 뇌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우습다 ​ 혐오의 죄책감도 없이 눌러 죽이고 찍어 죽이고 비벼 죽이는 밤 그나저나 살해가 이리 지겨워도 되나 고만 죽이고 싶다 해도 기를 쓰고 나온다 이깟 것들이 먹으면 대체 얼마를 먹는다고 쌀 한 톨을 두고 대치하는 나의 전선이여 아침에는 학습지를 파는 전화와..

10월 / 오 세 영

그림 / 김 복 연 ​ ​ ​ ​ 10월 / 오 세 영 ​ ​ ​ 무엇인가 잃어 간다는 것은 하나씩 성숙해 간다는 것이다.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돌아보면 문득 나 홀로 남아 있다. ​ 그리움에 목마르던 봄날 저녁 분분히 지던 꽃잎은 얼마나 슬펐던가, 욕정으로 타오르던 여름 한낮 화상 입은 잎새들은 또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때 이 지상에는 외로운 목숨 하나 걸려 있을 뿐이다. ​ 낙과(落果)여, 네 마지막의 투신을 슬퍼하지 말라. 마지막의 이별이란 이미 이별이 아닌 것 우리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별을 갖기 위해서 오늘도 잃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 ​ ​ 오세영 시집 / 천년의 잠 ​ ​ ​ ​

호수 시 모음 (속리산 저수지 풍경)

​ 호수 / 정 지 용 ​ ​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 ​ 눈을 감아도 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니 나는 탈이다. ​ ​ 시집 / 김용택이 사랑하는 시, 시가 내게로 왔다 2 ​ ​ ​ ​ 호수 / 송 수 권 ​ 가을 하늘이 호수를 찔러본다 소금쟁이가 구름 한 점을 빨대로 빨아 본다 가을 하늘이 호수에 누워 있다 다시 구름 한 점이 지나간다 돌 하나를 던져본다 고요가 얼음처럼 깨진다 ​ 송수권 시집 / 허공에 거적을 펴다 ​ ​ ​ ​ ​ 호수 연가 / 권 영 민 ​ 깊은 산 외로움 거느리고 바다보다 깊은 파문 속에 내리면 메아리 산울림 되어 달빛 총총히 별을 부른다 ​ ​ ​ ​ 천정호에서 / 나 희 덕 ​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