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문학이야기/명시

바구미를 죽이는 밤 / 문성해

푸른 언덕 2021. 10. 26. 07:38

그림 / 문 경 조

 

바구미를 죽이는 밤 / 문성해

 

처음엔 작은 활자들이 기어 나오는 줄 알았다

신문지에 검은 쌀을 붓고 바구미를 눌러 죽이는 밤

턱이 갈라진 바구미들을

처음에는 서캐를 눌러 죽이듯 손톱으로 눌러

죽이다가 휴지로 감아 죽이다가

마침내 럭셔리하게 자루 달린 국자로 때려 죽인다

죽음의 방식을 바꾸자 기세 좋던 놈들이 주춤주춤,

죽은척 나자빠져 있다가 잽싸게 도망치는 놈도 있다

놈들에게도 뇌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우습다

 

혐오의 죄책감도 없이

눌러 죽이고 찍어 죽이고 비벼 죽이는 밤

그나저나 살해가 이리 지겨워도 되나

고만 죽이고 싶다 해도 기를 쓰고 나온다

이깟 것들이 먹으면 대체 얼마를 먹는다고

쌀 한 톨을 두고 대치하는 나의 전선이여

아침에는 학습지를 파는 전화와 싸우고

오후에는 종이박스를 두고 경비와 실랑이하고

밤에는 하찮은 벌레들과 싸움을 한다

 

누가 등이 딱딱한 적들을 자꾸만 내게로 내보낸다

열기로 적으로 환해지는 밤,

누군가 와서 자꾸만 내 이불을 걷어 간다는 생각,

자꾸만 내게서 양수 같은 어둠을 걷어 간다는 생각,

날이 새도록 터뜨려 죽이는 이 어둠은 가히 옳은가

 

<문성해 시인 약력>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 매일 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자라><아주친근한 소용돌이>

<입술을 건너간 이름><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문학이야기 > 명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찬란 / 이병률  (0) 2021.10.27
가을 사랑 / 도 종 환  (0) 2021.10.26
10월 / 오 세 영  (0) 2021.10.24
울음 / 박 준  (0) 2021.10.23
호수 시 모음 (속리산 저수지 풍경)  (0) 2021.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