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1/09 29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 나 태 주

그림 / 유 은 방 ​ ​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 나 태 주 ​ ​ 서툴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어제 보고 오늘 보아도 서툴고 새로운 너의 얼굴 ​ 낯설지 않은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금방 듣고 또 들어도 낯설고 새로운 너의 얼굴 ​ 어디서 이 사람을 보았던가.... 이 목소리 들었던가 서툰 것만이 사랑이다 낯선 것만이 사랑이다 ​ 오늘도 너는 내 앞에서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오늘도 나는 네 앞에서 다시 한 번 죽는다. ​ ​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 ​

사진관 앞에서 / 이 효

그림 / 용 한 천 (개인전)​ ​ ​ ​ 사진관 앞에서 / 이 효 ​ ​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던 어린 날 붉은 벽돌 사진관 앞에 걸린 낯선 가족사진 한장 나비넥타이 매고 검정 구두 신은 사내아이 내 볼에 붉은 복숭아꽃 핀다 그 많던 가족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여윈 어깨의 검정 구두 남자도 홀로 액자 속을 걸어 나온다 사진관 불빛이 사라진 자리 젖은 바람 텅 빈 액자 속을지나 내 마음 벌판에 걸린다 ​ ​ ​ 출처 / 신문예 (106호)​ ​ ​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최승자

그림 / 김 미 영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 최승자 한 숟가락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로 말아서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도다고도 말하지 말고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서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

리기다소나무 / 정 호 승

그림 / 송 춘 희 ​ ​ 리기다소나무 / 정 호 승 ​ ​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는 비로서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 ​ ​ 정호승 시집 /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 ​ ​ ​ ​

눈물의 중력 / 신 철 규

그림 / 타니아 말모레호 ​ ​ 눈물의 중력 / 신 철 규 ​ ​ ​ 십자가는 높은 곳에 있고 밤은 달을 거대한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 한 사람이 엎드려서 울고 있다 ​ 눈물이 땅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막으려고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받고 있다 ​ 문득 뒤돌아보는 자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갈 때 바닥 모를 슬픔이 눈부셔서 온몸이 허물어질 때 ​ 어떤 눈물은 너무 무거워서 엎드려 울 수밖에 없다 ​ 눈을 감으면 물에 불은 나무토막 하나가 눈 속을 떠다닌다 ​ 신이 그의 등에 걸터앉아 있기라도 하듯 그의 허리는 펴지지 않는다 ​ 못 박힐 손과 발을 몸안으로 말아넣고 그는 돌처럼 단단한 눈물방울이 되어간다 ​ 밤은, 달이 뿔이 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 ​ ​ ​ ​ 시집 /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 ​

칼로 사과를 먹다 / 황 인 숙

그림 / 권 현 숙 ​ ​ 칼로 사과를 먹다 / 황 인 숙 ​ ​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무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남해 금산 / 이 성 복

작품 / 양 순 열 ​ ​ ​ 남해 금산 / 이 성 복 ​ ​ ​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 김용택 시집 /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 ​ ​ ​ ​ ​ ​ ​ ​

9월도 저녁이면 / 강 연 호

그림 / 정 경 혜 ​ ​ ​ ​ 9월도 저녁이면 / 강 연 호 ​ ​ ​ 9월도 저녁이면 바람은 이분쉼표로 분다 괄호 속의 숫자놀이처럼 노을도 생각이 많아 오래 머물고 하릴없이 도랑 막고 물장구치던 아이들 집 찾아 돌아가길 기다려 등불은 켜진다 9월도 저녁이면 습자지에 물감 번지듯 푸른 산그늘 골똘히 머금는 마을 빈집의 돌담은 제풀에 귀가 빠지고 지난여름은 어떠했나 살갗의 얼룩 지우며 저무는 일 하나로 남은 사람들은 묵묵히 밥상 물리고 이부자리를 편다 9월도 저녁이면 삶이란 죽음이란 애매한 그리움이란 손바닥에 하나 더 새겨지는 손금 같은 것 지난 여름은 어떠했나 9월도 저녁이면 죄다 글썽해진다. ​ ​ ​ 시집 / 시가 나에게 살라고 한다 ​ ​ ​ ​ ​ ​

날품 / 김 명 희

그림 / 정 은 하 ​ ​ 날품 / 김 명 희 ​ 이른 새벽 한 무리의 인부들이 봉고차에 실린다 이내 어느 현장으로 옮겨진 그들 어둠을 깨고 부수고 그 위에 아침을 쌓는다 건물이 한 뼘씩 오를 때마다 그들의 몸은 개미들처럼 작아진다 안전화는 전혀 안전하지 못한 공중만 떠들고 가벼운 지폐 몇 장 삼겹살과 소주로 선술집 상을 채우는 고마운 저녁 밤이 이슥해지자 한둘만 남기고 봉고차는 어둠저쪽 어디론가 사라지고 무심히 흘려 넣은 거나한 꿈들은 졸음 한켠 후미진 담벼락에서 음습한 절망으로 젖어간다 희망의 괘도를 벗어난 안전화만이 누군가의 넋두리를 따라서 귀가하는 밤 이젠, 욱신거리는 잠의 날품을 팔아야 할 시간이다 ​ ​ ​ ​ 김명희 시집 / 화석이 된 날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