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1/09 29

​석류 / 복 효 근

그림 / 송 춘 희 ​ ​ ​ 석류 / 복 효 근 ​ ​ 누가 던져놓은 수류탄만 같구나 불발이긴 하여도 서녘 하늘까지 붉게 탄다 네 뜰에 던져놓았던 석류만한 내 심장도 그랬었거니 불발의 내 사랑이 서천까지 태우는 것을 너만 모르고 나만 모르고 어금니 사려물고 안으로만 폭발하던 수백 톤의 사랑 혹은 적의 일지도 모름 ​ ​ 복효근 시집 / 꽃 앞에서 바지춤을 내리고 묻다 ​ ​ ​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 정 희

이재효 갤러리 ​ ​ ​ 지울 수 없는 얼굴 / 고 정 희 ​ ​ 냉정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부드러운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 ​ * 고정희 시집 ​ ​ ​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함 민복

그림 / 강 계 진 ​ ​ ​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함 민 복 ​ ​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건배하는 순간인가 ​ 눈물이 메말라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꽃철책이 시들고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 시집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 ​ ​ ​

야생화 / 박 효 신

그림 / 김 정 수 ​ ​ ​ ​ 야생화 / 박 효 신 ​ ​ 하얗게 피어난 얼음꽃 하나가 달가운 바람에 얼굴을 내밀어 아무 말 못했던 이름도 몰랐던 지나간 날들에 눈물이 흘러 ​ 차가운 바람에 숨어 있다 한줄기 햇살에 몸 녹이다 그렇게 너는 또 한번 내게 온다 ​ 좋았던 기억만 그리운 마음만 니가 떠나간 그길 위에 이렇게 남아 서 있다 잊혀질 만큼만 괜찮을 만큼만 눈물 머금고 기다린 떨림 끝에 다시 나를 피우리라 ​ 사랑은 피고 또 지는 타버리는 불꽃 빗물에 젖을까 두 눈을 감는다 ​ 어리고 작았던 나의 맘에 눈부시게 빛나던 추억속에 그렇게 너를 또 한번 불러본다 ​ 좋았던 기억만 그리운 마음만 니가 떠나간 그 길위에 이렇게 남아 서 있다 잊혀질 만큼만 괜찮을 만큼만 눈물 머금고 기다린 떨림 끝에 나는..

풍경(風磬) / 목 필 균

​ ​ 풍경(風磬) / 목 필 균 ​ ​ ​ 허공을 유영하며 평생을 눈뜨고 살아도 깨닫음은 허공만 맴도네 ​ 깨어나라 깨어나라 깨어나라 ​ 바람이 부서지며 파열되는 음소들 깊은 산사 ​ 어느 추녀 끝에 매달려 털어내다 지친 마른 비늘 ​ 어느 날 문득 가슴 속 네가 나이려니 내가 너 이려니 묻다가 대답하다 ​ 그렇게 한 세월 매달려 산다 ​ ​ ​ ​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 시 화​

그림 / 이고르 베르디쉐프 ​ ​ ​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류 시 화​ ​ ​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 ​ ​ 류시화 시집 / 그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 ​ ​

의자 / 이 정 록

그림 / 이 소 영 ​ ​ ​ ​ 의자 / 이 정 록 ​ ​ ​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 ​ ​ *이정록시집 / 의자 ​ ​ ​ ​ ​

바람은 말라버린 꽃 / 황 은 경

그림 / 이 영 주 ​ ​ ​ 바람은 말라버린 꽃 / 황 은 경 ​ ​ 바람을 맞고 우리는 건조한 사막의 여우가 됐어 바람에 널 잊게 되었고 우리는 모래에 안구를 씻으며 바람에 너를 잡고 있던 마음을 오아시스 샘가에 걸어두고 바람에 의지하던 야자수 기둥 사이로 집 한 채 짓고 살았다 ​ ​ 그 바람에 마음 하나 날려 버렸다. ​ ​ 시들고 있다. 시들어 버린 그 마음은 마른 바람꽃 유성이 진 자리마다 저리게 걸어 온 길 ​ ​ 바람이 불어오면 슬픈 알람이 울어 바람에 세수하고 다시 깨어나는 가시 달린 눈 바람은 말라버린 꽃을 향해 쓰러지고 마음 하나 배웅하니 편하다. ​ ​ ​ 황은경 시집 / 생각의 비늘은 허물을 덥는다. ​ ​ ​ ​

섬 / 정 현 종

그림 / 김 경 희 ​ ​ ​ ​ ​ 섬 / 정 현 종 ​ ​ ​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않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직 한 웅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쪽이 비어있다 ​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 ​ ​ ​ ​ 정현종 시인, 소설가 *1939년 서울 출생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 *'현대문학' 등단 *시집: '사물의 꿈', '나는 별 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견딜 수 없네' 등 *시선집 : '고통의 축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