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1/09 29

말표 고무신 260 / 나 호 열

그림 / 최 윤 아​ ​ ​ 말표 고무신 260 / 나 호 열 ​ 일주일에 한 번 산길 거슬러 오는 만물트럭 아저씨가 너를 데려다주었어 말표 흰 고무신 260 산 첩첩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 이곳에서 몇날며칠을 달려도 닿지 못하는 지평선을 향해 내 꿈은 말이 되어보는 것 이었어 나도 말이 없지만 너도 말이 없지 거추장스러운 장식도 없이 그저 흙에 머리를 조아릴 때 내 못난 발을 감싸주는 물컹하게 질긴 너는 나의 신이야 ​ * 월간 중앙 / 2021년 9월호 ​ ​ ​

푸른 밤 / 나 희 덕

그림 / 드미트리 홀린 (러시아) ​ ​ ​ 푸른 밤 / 나 희 덕 ​ ​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 ​ 김용택 시집 /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 ​ ​ ​

한 잎의 여자 / 오 규 원

그림 / 권 신 아 ​ ​ ​ 한 잎의 여자 / 오 규 원 ​ ​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 ​ 시집 /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

연못을 웃긴 일 / 손택수

그림 / 아고르 베르디쉐프 (러시아) ​ ​ 연못을 웃긴 일 / 손택수 ​ ​ 못물에 꽃을 뿌려 보조개를 파다 ​ 연못이 웃고 내가 웃다 ​ 연못가 바위들도 실실 물주름에 웃다 ​ 많은 일이 있었으나 기억에는 없고 ​ 못가의 벚나무 옆에 앉아 있었던 일 ​ 꽃가지 흔들어 연못 겨드랑이에 간질밥을 먹인 일 ​ 물고기들이 입을 벌리고 올라온 일 ​ 다사다난했던 일과 중엔 그중 이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 ​ ​ * 손택수 시집 /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 ​

제 눈을 꺼 보십시오 / 릴케

그림 / 이르고 베르디쉐프 (러시아) ​ ​ ​ 제 눈을 꺼 보십시오 / 릴케 ​ 제 눈을 꺼 보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제 귀를 막아 보십시오. 그래도 당신을 들을 수 있습니다. 다리가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으며 입이 없어도 당신에게 청원할 수 있습니다. 저의 팔을 꺾어보십시오. 손으로 하듯 저는 저의 심장으로 당신을 붙잡습니다. 저의 심장을 멎게 해보십시오. 저의 뇌가 맥박칠 것입니다. 당신이 저의 뇌에 불을 지피면 저는 저의 피에 당신을 싣고 갈 것입니다. ​ ​ *1901 순례자 / ​ ​ ​

나팔꽃 / 이해인

그림 / 김 정 수 ​ 나팔꽃 / 이 해 인 ​ ​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의 생애는 당신을 행해 열린 아침입니다 ​ 신선한 뜨락에 피워 올린 한 송이 소망 끝에 내 안에서 종을 치는 하나의 큰 이름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 순명(順命)보다 원망을 드린 부끄러운 세월 앞에 해를 안고 익은 사랑 ​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날 나는 한 송이 나팔꽃입니다 *1945년 강원도 양구 출생 *1964년 수녀원 *필리핀 성 루이스대학 영문학과,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 * 제9회 제2회 제6회 을 수상 * 첫 시집 * 시집

길 위에서의 생각 / 류 시 화

그림 / 송 춘 희 ​ ​ 길 위에서의 생각 / 류 시 화 ​​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은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갔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 ​ ​ 류시화 시집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 ​ ​

저 거리의 암자 / 신 달 자

그림 / 용 환 천 ​ ​ ​ ​ 저 거리의 암자 / 신 달 자 ​ ​ ​ 어둠 깊어가는 수서역 부근에는 트럭 한 대분의 하루 노동을 벗기 위해 포장마차에 몸을 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이 함께 야간 여행을 떠납니다 밤에서 밤까지 주황색 마차는 잡다한 번뇌를 싣고 내리고 구슬픈 노래를 잔마다 채우고 빗된 농담도 잔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속풀이 국물이 짜글짜글 냄비에서 끓고 있습니다 거리의 어둠이 짙을수록 진탕으로 울화가 짙은 사내들이 해고된 직장을 마시고 단칸방의 갈증을 마십니다 젓가락으로 집던 산 낙지가 꿈틀 상 위에 떨어져 온몸으로 문자를 쓰지만 아무도 읽어 내지 못합니다 답답한 것이 산 낙지뿐입니까 어쩌다 생의 절반을 속임수에 팔아 버린 여자도 서울을 통째로 마시다가 속이 뒤집혀 욕을 게워 ..

여행 2 / 나 태 주

그림 / 임 창 순 ​ ​ ​ 여행 2 / 나 태 주 ​ ​ ​ 예쁜 꽃을 보면 망설이지 말고 예쁘다고 말해야 한다 ​ 사랑스런 여자를 만나면 미루지 말고 사랑스럽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 이다음에 예쁜 꽃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 우리네 하루하루 순간순간은 여행길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오직 한 번뿐인 여행이니까. ​ ​ ​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 ​ ​ ​ ​

단단하지 않은 마음 / 강 우 근 < 2021,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그림 / 안 영 숙 ​ ​ ​ ​ 단단하지 않은 마음 / 강 우 근 ​ 별일 아니야,라고 말해도 그건 보이지 않는 거리의 조약돌처럼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고 작은 감기야,라고 말해도 창백한 얼굴은 일회용 마스크처럼 눈앞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눈병이 걸렸고, 볼에 홍조를 띤 사람이 되었다가 대부분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있다. 병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밥을 먹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걸어오는 우리처럼 살아가다 죽고 만다. 말끔한 아침은 누군가가 소독한 병실처럼 오고 있다 저녁 해가 기울 때 테이블과 의자를 내놓고 감자튀김을 먹는 우리들은 축구 경기를 보며 말한다. “정말 끝내주는 경기였어” 나는 숨을 고른 채로 숨을 고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