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1/08 31

사랑이 올 때 / 나 태 주

​ ​ ​ 사랑이 올 때 / 나 태 주 ​ ​ ​ ​ 가까이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자주 그의 눈빛을 느끼고 ​ ​ 아주 멀리 헤어져 있을 때 그의 숨소리까지 듣게 된다면 분명히 당신은 그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 ​ 의심하지 말아라 부끄러워 숨기지 말아라 사랑은 바로 그렇게 오는 것이다 ​ ​ 고개 돌리고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 ​ ​ 시집 / 나태주 대표 시선집 ​ ​ ​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 김 경 주

그림 / 소 순 희 ​ ​ ​ ​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 김 경 주 ​ ​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 바람이 벽에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

가을이 오면 / 이 효

그림 / 권 현 숙​ ​ ​ ​ 가을이 오면 / 이 효 ​ ​ ​ 수국 꽃잎 곱게 말려서 마음과 마음 사이에 넣었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 뜨거운 여름 태양을 바다에 흔들어 빨았더니 가을이 왔습니다 ​ 봄에 피는 꽃보다 붉은 나뭇잎들 마음을 흔드는 것은 당신 닮은 먼 산이 가을로 온 까닭입니다 ​ 멀리서 반백의 종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올 때면 무릎 꿇고 겸손하게 가을을 마중 나갑니다 ​ ​ ​ ​ 신문예 109호 수록 (가을에 관한 시)​ ​ ​ ​

하늘 옷감 / 정 연 복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은 ​ 바느질한 흔적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져 ​ ​ 온 세상 휘휘 두른 거대한 옷감이다 ​ ​ 저 연파랑 옷감의 한 조각을 잘라내어 ​ 옷 한 벌 만들어 입고 싶다 ​ 세상살이 먼지 잔뜩 낀 ​ 내 추한 마음에 살며시 두르고 싶다. ​ 장소 / 우리 옛돌 박물관 (야외 스케치) ​ ​ ​ ​ ​ 하늘 옷감 / 정 연 복 ​ ​ 구름 한 점 없는 쪽빛 하늘은 ​ ​ 바느질한 흔적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져 ​ ​ 온 세상 휘휘 두른 거대한 옷감이다 ​ ​ 저 연파랑 옷감의 한 조각을 잘라내어 ​ ​ 옷 한 벌 만들어 입고 싶다 ​ ​ 세상살이 먼지 잔뜩 낀 ​ ​ 내 추한 마음에 살며시 두르고 싶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 파불루 네루다

그림 / 안 영 숙 ​ ​ ​ ​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가 / 파불루 네루다 ​ ​ ​ 사랑이여, 건배하자, 추락하는 모든 것과 꽃 피는 모든 것들을 위해 건배, ​ 변하고, 태어나 성장하고, 소멸되었다가 다시 입맞춤이 되는 것들을 위해, ​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과 땅 위의 모든 것들을 위해 건배, ​ 우리의 삶이 사위어 가면 그땐 우리에게 뿌리만 남고 바람은 증오처럼 차겠지. ​ 그땐 우리 껍데기를, 손톱을, 피를, 눈길을 바꾸자꾸나, 네가 내게 입 맞추면 난 밖으로 나가 거리에서 빛을 팔리라. ​ 밤과 낮을 위해 그리고 영혼의 사계절을 위해 건배. ​ ​ ​ Pablo Neruda (파블루 네루다) *출생 1904년 7월 12일, 칠레 *사망 1973년 9월 23일 (향년 69세) *칠레..

비 내리는 경춘선 숲길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나? ​ 밤새워 쓴 긴 편지는 물에 젖고 ​ 가을은 느린 호흡으로 온다. ​ 목을 떨구는 짧은 문장들 ​ 곱디고운 백일홍은 긴 편지지에 ​ 젖은 마음 곱게 써 내려간다. ​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는데 ​ 청춘의 꿈은 저리도 화안한데 ​ 빌어먹을 세월 곱기도 해라. ​ 소리 없이 혼자 우는 사내들 ​ 환한 미소로 매달리는 어린 자식들 ​ 넘어져도 한 걸음씩 용기 내서 가자. ​ 사내는 아직도 건장하다. ​ 울지 마라! 코로나로 무너진 터전 일구자. ​ 매일 새벽마다 가꾸고 또 가꾼다. ​ 남몰래 흘린 눈물, 상처가 아물고 ​ 소박한 일상을 피어 올린다. ​ 가슴이야 피멍이 들었지만 ​ 그 타오르는 불길, 사자의 포호처럼 ​ 새로운 출발을 한다. ​ ..

집사람 / 홍해리

그림 / 최 종 태 ​ ​ ​ 집사람 / 홍해리 ​ 집은 그런 것이었다 아픔이라고 또는 슬픔이라고 무슨 말을 할까 속으로나 삭이고 삭이면서 겉으로 슬쩍 금이나 하나 그었을 것이다 곡절이란 말이 다 품고 있겠는가 즐겁고 기쁘다고 춤을 추었겠는가 슬프고 외로웠던 마음이 창문을 흐리고 허허롭던 바깥마음은 또 한 번 벽으로 굳었을 것이다 아내는 한 채의 집이었다 한평생 나를 품어준 집이었다 ​ ​ 홍해리 시선집 / 마음이 지워지다 ​ ​ ​

그릇 6 / 오 세 영

그림 / 김 정 화 2 ​ ​ ​ ​ 그릇 6 / 오 세 영 ​ ​ ​ 그릇에 담길 때 물은 비로소 물이 된다 존재가 된다 잘잘 끓는 한 주발의 물 고독과 분별의 울안에서 정밀히 다져가는 질서 그것은 이름이다 하나의 아픔이 되기 위하여 인간은 스스로를 속박하고 지어미는 지아비에게 빈 잔에 차를 따른다. 엎지르지 마라, 업질러진 물은 불이다 이름없는 욕망이다. 욕망을 다스리는 영혼의 형식이여, 그릇이여 ​ ​ ​ ​ ​​ 모순의 흙 / ​ ​ ​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 윤 성 택

그림 / 김 행 일 ​ ​ ​ ​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 윤 성 택 ​ ​ ​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들고 있던 화분이 떨어지고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억을 엎지르는 동안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내 안 실뿌리처럼 추억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흙을 모아 채워 넣고 앞으로는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손으로 꾹꾹 눌러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꽃잎은 말없이 흔들렸습니다 앞으로는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위태하게 볕 좋은 옥상으로 너를 옮기지 않겠노라고 원래 자리가 그대 자리였노라 물을 뿌리며 꽃잎을 닦아내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 ​ ​ ​ *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 * 시집으로 (문학동네,2006) * 현재 문..

상처에 대하여 / 복 효 근

그림 / 박 항 률 상처에 대하여 / 복 효 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었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 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시집 / 마음이 예뻐지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