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2021/10 32

​가을 / 송찬호

그림 / 이 규 영 ​ ​ ​ ​ 가을 / 송찬호 ​ ​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 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고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 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

북촌 걷기 좋은 길

누군가 작품을 만들어 놓았다. 가을과 자동차 색이 너무 잘 어울린다. ​ 지인과 함께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북촌 길로 들어섰다. ​ 벽화가 그려진 아기자기한 골목길 언제 걸어도 기분이 좋다. ​ 한옥의 예쁜 나무 창문들 선조들의 섬세한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 나팔꽃이 담을 타고 올라간다. 옷집이랑 너무 운치 있게 잘 어울린다. ​ 가을 옷을 살까 말까 망설이다. 포기한다. 장롱에 옷이 너무 많다 알뜰하게 살자. ​ 청국장집이다. 점심은 이미 비빔밥으로 먹었다. 다음에 가볼 맛집으로 정했다. ​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참 예쁘다. 가을에는 멋진 가방 하나 둘러매고 여행을 떠나고 싶다. ​ 차 한잔하려고 분위기 있는 찻집을 찾는 중이다. 커피보다는 100% 천연 주스를 선호한다. ​ 노란 벽색깔이 촌스러울 ..

시월 / 목 필 균

그림 / 김 은 숙 ​ ​ ​ 시월 / 목 필 균 ​ ​ 파랗게 날 선 하늘에 삶아 빨은 이부자리 홑청 하얗게 널면 ​ 허물 많은 내 어깨 밤마다 덮어주던 온기가 눈부시다 ​ 다 비워진 저 넓은 가슴에 얼룩진 마음도 거울처럼 닦아보는 시월 ​ ​ ​ 1946년 함양 출생 춘천교육대학졸업, 성신여대교육대학원졸업 ​ 1972년 신춘문예 단편 강원일보당선 1975년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세대지 시집 : 풀꽃 술잔 나비 ​ ​ ​ ​ ​ ​

벽 / 정 호 승

그림 / 김 정 수 ​ ​ ​ 벽 / 정 호 승 ​ ​ ​ 나는 이제 벽을 부수지 않는다 따스하게 어루만질 뿐이다 벽이 물렁물렁해질 때까지 어루만지다가 마냥 조용히 웃을 뿐이다 웃다가 벽 속으로 걸어갈 뿐이다 벽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봄눈 내리는 보리밭길을 걸을 수 있고 섬과 섬 사이로 작은 배들이 고요히 떠가는 봄바다를 한없이 바라볼 수 있다 ​ ​ 나는 한때 벽 속에는 벽만 있는 줄 알았다 나는 한때 벽 속의 벽까지 부수려고 망치를 들었다 망치로 벽을 내리칠 때마다 오히려 내가 벽이 되었다 나와 함께 망치로 벽을 내리치던 벗들도 결국 벽이 되었다 부술수록 더욱 부서지지 않는 무너뜨릴수록 더욱 무너지지 않는 벽은 결국 벽으로 만들어지는 벽이었다 ​ ​ 나는 이제 벽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벽을 타고..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 재 삼

그림 / 김 진 숙 ​ ​ ​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 재 삼 ​ ​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것네. ​ ​ 시집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

병정들 / 오 경 은

그림 / 김 경 화​ ​ ​ ​ 병정들 / 오 경 은 ​ 성당 천장에 닿을 수 있을까 나를 몇 토막 쌓아야 ​ 맨 뒷줄에서 바라본 신부님은 플라스틱 병정 같고 ​ 죄랑 조금 더 친해진다 미사 내내 앉았다 일어났다 고장난 스프링처럼 ​ 허벅지 사이에 땀 차서 싫죠 신부님도 옷 벗고 싶죠 ​ 꼬리를 치켜올린다 벤치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주인 없는 고양이가 ​ 죄는 언제나 일인용이어서 ​ 옆에 앉은 사람과 포옹을 나눌 때마다 죄는 자꾸 다정해지지 덕담처럼 ​ 미사포로 코를 풀어도 용서해줄 거지? ​ 성당을 나서자 몰아치는 햇빛 ​ 고양이가 수풀 사이로 뛰어들었다 찐득거리는 그림자를 불쾌해하는 기색없이 ​ ​ ​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중 *2018년 중앙신인 문학상 시 부문 당..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 글로리아 밴더빌트

그림 / 김 복 연​ ​ ​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 글로리아 밴더빌트 ​ ​ 사랑은 조용히 오는 것 외로운 여름과 거짓 꽃이 시들고도 기나긴 세월이 흐를 때 사랑은 천천히 오는 것 얼어붙은 물속으로 파고드는 밤하늘의 총총한 별처럼 조용히 내려앉는 눈과같이 조용히 천천히 땅속에 뿌리박는 풀처럼 사랑은 더디고도 종용한 것 내리다가 흩날리는 눈처럼 사랑은 살며시 뿌리로 스며드는 것 씨앗이 싹트듯 달이 커지듯 천천히 ​ ​ ​ 시집 / 매일 시 한 잔 ​ ​ ​

천보산(청년들)아! 듣고 있니?

오후에 비가 온다고~ 그래도 하루를 보람 있게 살아야지. ​ 산행 포기할까? 아냐, 오전에 부지런히 다녀와야지~ 좋은 일을 반복하면 좋은 인생을 살잖아. ​ 태산에 부딪혀 넘어지는 사람은 없어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작은 흙무더기야 ​ 사랑은 우리처럼 하는 거야. 행복의 비결은 서로를 신뢰하는 거야. ​ 소나무가 불안하다. 얘들아! 함부로 뛰어내리지 말아라. ​ 인생에서 힘든 시기는 나쁜 날씨가 계속될 때가 아니라 구름 한 점 없는 날들만 계속될 때야. ​ 힘들겠지만 조금 더 길을 찾아봐. 분명히 길은 어딘가에 있단다. ​ 때로는 거미줄에 걸릴 수도 있어. 그렇다고 도전조차 안 하면 되겠니? ​ 언젠가는 무르익을 날이 올 거야 나뭇잎이 다 떨어져 나가도 한 장은 남잖아. 슬퍼하지마 구름 뒤에는 태양이 빛나..

​시월을 추억함 / 나호열

그림 / 구 경 순 ​ ​ ​ ​시월을 추억함 / 나호열 서러운 나이 그 숨찬 마루턱에서 서서 입적(入寂)한 소나무를 바라본다 길 밖에 길이 있어 산비탈을 구르는 노을은 여기저기 몸을 남긴다 생(生)이란 그저 신(神)이 버린 낙서처럼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풀꽃이었을까 하염없이 고개를 꺾는 죄스런 모습 아니야 아니야 머리 흔들 때마다 우루루 쏟아져 나오는 검은 씨앗들 타버린 눈물로 땅 위에 내려앉을 때 가야할 집 막막하구나 그렇다 그대 앞에 설 때 말하지 못하고 몸 뒤채며 서성이는 것 몇 백 년 울리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 나이었던가 향기(香氣)를 버리고 빛깔을 버리고 잎을 버리는 나이 텅 빈 기억 속으로 혼자 가는 발자국 소리 가득하구나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