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언덕 (이효 시인 티스토리)

어두운 밀실에서 인화 되지 못한 가난함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텅 빈 거실에 무명 시 한 줄 낡은 액자에 걸어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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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짐

뒷짐 / 문 인 수 국도에서 바닷가를 향해 갈라지는 길 입구에, 한 할아버지가 힘겹게 발거름을 떼고 있다. 잔뜩 꼬부라진 허리 때문에 길이 오히려 노인의 배꼽 쪽으로, 가랑이 사이로 파고드느라 여러 굽이 시꺼멓게 꿈틀대며 애를 먹는다. 우리는 휑하니 차를 몰아 이곳 저곳 포구를 돌아보고 올망졸망한 섬 풍경 앞에 내려 히히거리다 다시 국도 쪽으로 나왔다. 그 갈림길 입구, 거기서 이제 겨우 삼백미터 앞에서 또 한참 전에 지나친 노인을 만났다. 지팡이도 없는 더딘 발걸음의 저 오랜 말씀 ㄱ자의 짐은 ㄱ자다. 흐린 시선으로 짚어낸 길바닥엔 시시각각 채 썬 중심이 촘촘하겠다. 그 등허리에 실려 낱낱이 외로운 열 손가락, 두 손끼리 가끔 매만지며 느리게 간다.

열쇠

열쇠 / 김 혜 순 역광 속에 멀어지는 당신의 뒷모습 열쇠 구멍이네 그 구멍 속이 세상 밖이네 어두운 산 능선 열쇠의 굴곡처럼 구불거리고 나는 그 능선을 들어 당신을 열고 싶네 저 먼 곳, 안타깝고 환한 광야가 열쇠 구멍 뒤에 매달려 있어서 나는 그 광야에 한 아름 백합을 꽂았는데 찰칵 우리 몸은 모두 빛의 복도를 여는 문이라고 죽은 사람들이 읽은 책에 씌어 있다는데 당신은 왜 나를 열어놓고 혼자 가는가 당신이 깜박 사라지기 전 켜놓은 열쇠 구멍 하나 그믐에 구멍을 내어 밤보다 더한 어둠 켜놓은 캄캄한 나체 하나 백합 향 가득한 그 구멍 속에서 멀어지네

돌짝밭 (자작 시)

돌짝밭 / 이 효 돌짝밭이 울었다 씨앗을 품었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기에는 머리를 짓누르는 돌이 무겁다. 흑수저는 울었다 꿈을 품었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기에는 삶을 짖누르는 돈이 무겁다. 내게 물을 주는 자 누구인가? 사람들이 절망을 말할 때 희망을 말하는자 모두가 끝을 말할 때 시작을 말하는 자 입안 한가득 붉은 고추장을 찍은 쌈이 파랗게 피어난다.

돌짝밭의 싹

그래도 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보름이 지나도 땅속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옥토라면 벌써 싹이 나고 또 나왔을 시간이다. 그렇게 씨앗을 심은 지 한 달하고 보름 정도가 지났다. 힘없는 싹들이 비실비실 올라오기 시작한다. 나는 부지런히 걸음도 주고, 물도 주었다. 나의 정성에 돌짝밭이 드디어 반응을 한다. 어린 케일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무 감격스럽고 사랑스럽다. 어린싹들이 돌짝밭으로 머리를 들고 올라오느라 얼마나 인내를 했을까? 그 후로 더 정성껏 물을 주었다. 나의 노력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케일이 쑥쑥 자랐다. 오늘은 감격스러운 날이다. 처음으로 케일 잎을 수확한다. 조심스럽게 잎을 몇 장 땄다. 저녁 밥상에 올릴 생각이다. 어린 배춧잎도 올라온다. 너무 촘촘히 심은 것 같아서 사이사이를 속..